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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리스 GHL 합작_edited.jpg

Don't say a word

그림 : 레트로님(@ML_GC_SX_Hae)

​글 : 소금님(@ok012345679)


 

 

 

 

 "필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냐!"

 녹슨 왕관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울화를 이기지 못한 아디리스가 이제는 막무가내로 손에 잡히는 것들을 내던지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을 언어를 섞어 소리치는 아디리스를 안개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축축한 동굴에서 단말마 대신 울려 퍼지던 그의 기도를 동아줄 삼아 끌어올린 장본인답게, 안개는 이정표를 잃은 사제에게 신을 이름을 빌려 계시를 내리는 대신 그의 등을 새로운 진창으로 떠밀었을 뿐이었다. 

 안개는 채울 수 없는 갈망이야말로 그들을 오래도록 가꿀 수 있는 양분이라 믿었다. 그랬기에, 아디리스의 갈 곳 없던 분노가 드디어 극에 이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당연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기도에 응당한 가치를 되돌려 받고야 말겠다는, 그만큼 제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라는 호된 고함이 돌바닥 위로 쩌렁쩌렁 울렸다. 안개는 여태껏 그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바를 들어준 적이 없었다. 다만 안개는 종종 의미 모를 변덕 또한 즐겼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아디리스의 차례가 돌아왔을 뿐이었다.

-

 돌벽을 뚫을 듯 요란한 빗소리에 아디리스는 느릿하게 두 눈을 떴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퀴퀴한 습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었.. 두 눈이라고? 아디리스는 다급하게 제 얼굴을 더듬었다. 불탄 고목처럼 우둘투둘했던 왼쪽 반신의 촉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신전 밖으로 힘껏 달음박질했다. 이질적인 맑은 물이 감도는 분수의 수면에 얼굴을 비춰본 아디리스는 기어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병증이 남기고 간 끔찍한 그을음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영영 몸을 좀먹을 줄만 알았던 고통도, 나뭇진보다도 독하게 엉겨 붙던 고름의 흔적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디리스는 여전히 제 꼴을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고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아예 물을 끼얹어 씻어보기도 했다. 신도들의 경애와 흠모를 받아 반짝거렸던, 이채와 영광이 어린 틀림없는 그때의 모습이었다. 뒤늦게 아디리스의 얼굴이 벌겋게 끓어올랐다. 

 분을 못 이겨 고래고래 날뛰던 것은 어찌 차치하고서라도, 당장 짐승마냥 흙발로 동분서주했다는 부끄러움만큼은 무어라 덮을 말이 없었다. 꼴이 어찌 되었건 그는 엄연한 사제였다. 

 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아디리스는 꼭 이렇듯 난처할 적에만 태산만 한 덩치로 온 사방을 쏘다니는 지저분한 사냥꾼과 맞닥뜨리고는 했다. 요상하게도 그 아른대는 눈깔만 봤다 하면 매번 머리꼭지서부터 슬그머니 부아가 끓는 것이었다. 

 갈 곳 없는 시새움, 바른대로 고하자면 질투였다. 남겨진 왼쪽 반신은 그가 가진 찬란한 신앙의 증거임과 동시에 끝내 구원으로의 발을 들이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비참한 이단의 낙인이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그였지만 그러한 믿음이 남긴 흔적에서만큼은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또 뭘 흘긋대는 게냐."

 매번 그래왔듯 야멸차게 쏘아붙였으나 그는 언제나 흥얼거리던 콧노래를 멈춘 채 멀거니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보아온 바에 의하면, 안개는 그와 자신의 영역을 아예 같은 땅뙈기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염치없는 무뢰한이 흙발로 신전을 쏘다니는 꼴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에 아디리스는 입술을 비죽이고는 알만하다는 투로 내뱉었다.

 "그래, 네 눈에도 그리 신기하더냐?"

 주억거리는 시늉 한 번 않던 사냥꾼이 그 말에 아디리스의 발치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젖은 풀 비린내가 지척으로 밀려들었다. 곧 한 쌍의 까만 눈알이 그를 이리저리 훑었다. 사냥꾼은 어느새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대뜸 고개를 들이밀기까지 했다. 

 분칠한 가면 뒤로 보이는 얼굴은 의외로 차분한 빛깔이었다. 어쩌면 이 어수룩한 상판대기를 이만큼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은 그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그가 제 왕관 꼭대기만큼이나 키가 큰 탓이었다.  

 "이번만큼은 그 지저분한 낯짝을 함부로 들이민 죄를 눈감아 줄 터이니 냉큼 떨어지거라."

 아마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아디리스는 생각했지만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재까닥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는 금세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안개는 무슨 재간을 부리고 싶었던 걸까? 축축한 풀을 밟는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서도 아디리스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희생제였음에도 아디리스는 아주 신이 났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삐걱거리지 않는 육신을 자유자재로 부리며 아디리스는 스스로를 찬미했다. 영광은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다름없다 하였는가? 그러나 그 모래가 실은 사금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누가 선뜻 손을 털어버리겠느냔 말이다. 아디리스는 그렇게 제풀에 얼굴이 욱신거릴 때까지 한참을 소리없이 웃었다. 오죽 기분이 좋았던 탓일까, 숲의 경계에 다다를 때서도 그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지금이라면 그 사냥꾼이 어떤 얼빠진 짓을 하고 있어도 못 이기는 척 여흥 삼아 엉겨봄 직한 기분이었다. 허나 오두막은 고요했다. 하지만 아디리스는 한 치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여태껏 그가 그랬던 것처럼 뻔뻔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디리스는 굴러다니던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향로의 불씨를 옮겨붙였다. 장작을 삼킨 난로가 요란하게 타올랐다. 튀어 오르는 불티를 바라보던 아디리스는 낡은 의자 하나를 끌어와 난롯가에 앉았다. 

 불은 언제나 그를 안심시켰다. 온종일 사제들의 몸종 노릇을 했던 시절에도 화롯불을 때는 것만큼은 즐거워했다. 다섯 살 무렵 가족에게서 내버려졌던 아디리스를 보듬어준 존재 또한 불이었다. 모든 근심을 살라버릴 듯한 찬란한 세례 속에서 그는 비로소 사제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연기처럼 너울거리는 잡념을 쫓아 아디리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오두막으로 돌아온 안나는 여지껏 본 적 없던 사제의 작태에 잠시 당황하였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그가 정말로 툭하면 제게 쇳소리를 내지르고 호통을 치던 존재와 같은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만큼 사제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안나는 널어두었던 가죽 한 장을 가져와 그의 휑한 무릎께를 덮어주었다. 곧 안나는 저도 모르게 가면 아래로 드러난 얼굴을 손으로 북북 긁었다. 거미줄은 커녕 파리 한 마리 없는 지붕 아래에서 도대체 뭐가 그리도 간지러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상판에 무두질이라도 할 참이냐?"

 곤히 잠든 줄로만 알았던 사제가 어느새 그에게 말을 붙여왔다. 벌게지도록 목줄기를 긁던 그를 물끄러미 보던 사제는 잇소리를 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또 한바탕 악다구니나 내뱉겠거니 싶어 안나는 못 들은 체를 했다. 그러나 사제는 아무 말도 않더니 이제는 아예 향로마저 내버려 두고 문밖으로 나섰다. 별안간 벌어진 기행을 이해하지 못해 안나는 바닥에 퍼지른 그대로 얼마간 멀뚱거렸다. 이윽고 돌아온 사제는 시척지근한 냄새가 나는 고약 한 뭉치를 꺼내 그에게 디밀었다. 

 "썩 받지 못하겠느냐?"

 여차하면 집어던지기라도 할 법한 말본새였다. 허나 그마저도 어지간히 못 미더웠는지, 사제는 기어이 장식을 벗어던진 손으로 고약 뭉텅이를 움큼 퍼올렸다. 

 "참으로 골치로구나."

 비를 맞고 돌아온 사제의 몸이 차가웠던 탓인지, 아니면 고약이 닿는 자리가 되레 차갑다는 착각이 들 만큼 홧홧했던 탓인지 안나는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흠칫 등을 떨었다. 

 "엄살로 잘못 구르는 체만 했다간 봐라. 내 아주 깨끗이 팔다리를 분지를 테니." 


 
아디리스는 마치 그 광경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한 차례 낄낄거렸다.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긁어내지 말라는 언질을 끝으로 미련없이 오두막을 떠나는 사제의 뒷모습은 경쾌하기까지 했다. 안나는 남은 약을 가면을 벗은 얼굴에 대강 훑어 발랐다. 그리고는 식어가는 난롯가에 홀로 비스듬히 몸을 뉘였다. 숲을 두들기는 빗방울의 수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덧 사제가 이곳에 온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사제가 느닷없는 친절을 베푼 이유를 안나는 아직 알 길이 없다. 빗소리가 천천히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그는 그렇게 까무룩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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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디리스는 검댕이 옮겨 묻은 손을 아무렇게나 닦아냈다. 짓무른 살점에 천이 스치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몸가짐을 조심해야만 했던 과거가 이제는 마냥 거짓말만 같다. 푸르죽죽한 풀물이 든 발을 씻는 것도 그저 즐겁기만 했다. 기별 없이 시작된 이 신묘한 조화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만이 그가 가진 걱정의 전부였다. 

 안개는 이전만큼 그를 희생제에 자주 내보내지 않았고, 그에 아디리스는 그 낯선 한가로움을 굳이 마다치 않고 부러 제 자리와 먼 영역까지도 종종 다녀오는 취미를 들였다. 같은 이유로 예전보다 그 얄미운 사냥꾼을 덜 마주치기는 하였으나 당장은 그뿐이었다. 그만큼 아디리스는 태평스러웠다. 막연히 제 몫을 운 나쁜 누군가가 적당히 떠맡았겠기로서니 고작 그것으로 대단한 사고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안나는 이미 들쑤셔진 게 분명한 나무 궤짝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벌겋게 갈라진 피부가 또 한 차례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발진은 도통 가라앉지 않았다. 오래전 어머니가 일러주었던 풀뿌리를 캐다 온종일 씹어보기도 했지만 증세는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오죽 간절하였으면 안나는 종종 제 반타작이나 될까 한 생존자들이 뜀박질에 채이느라 놓고 간 빨간 상자 따위가 보이면 그나마도 뒤적거렸다. 

 붕대가 척척해질 때까지 연거푸 허탕을 겪고 나니 이제는 울화까지 치밀었다. 뭉툭해진 손톱 아래로 피가 맺힐 때까지 안나는 밭은 노성을 내지르며 온몸을 쥐어뜯었다. 북슬북슬한 송충이가 생살 위로 기는 것만 같은 가려움은 온종일 그를 괴롭혔다. 그 바람에 삐끗하여 손도끼를 놓친 적도 부지기수였다. 무르고 터진 살갗은 걸핏하면 따끔거렸다. 
안나는 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사원의 외곽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희한하게도 사제는 근래부터 어딘가 종일 쏘다니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예전만큼 사원을 지키고 돌지는 않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름의 기별도 없이 무던히 그곳을 들락거렸다. 사제가 그의 얼굴에 억지로 쓱쓱 문대던 시커먼 약을 좀 더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썩 갈무리에 취미가 없는 모양이었는지 안나는 이내 조그만 그릇들을 들추고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버릇대로 코를 가까이 대니 쏘는 듯한 신내가 삽시간에 골을 타고 울렸다. 곰삭은 나무뿌리 따위를 대강 걷어내고 안나는 연고를 챙겨 사원을 나섰다. 혹 흔적이 들키면 사제가 한달음에 쫓아와 경을 치기라도 할까 봐 곳곳에 불거진 돌부리에 발을 터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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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하기로 제물 중에서도 막되먹은 놈은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놈은 손잡이가 달린 농만 봤다 하면 그 안팎에서 종일 대거리를 치며 소란을 내고, 또 어떤 놈은 눈치만 살살 보며 도망치는 체를 하다가도 하면 엎어진 나무판 위를 펄쩍펄쩍 넘어 다니는 숫제 산 다람쥐 같은 놈도 있었다. 맘 같아서는 아주 향로 대신 사슬에 동여 묶어 죄 돌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 얼마간의 요양으로 모르는 새 심성이 많이 가라앉은 탓이었는지 아디리스는 욕지기를 뱉는 대신 이 간 큰 날도둑놈의 정체를 나름대로 추려가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드나든 자국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헛짚었겠거니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훤히 뚫린 봉납실을 내버려 두고 굳이 헛헛한 제단 주변을 뒤진 꼴이 어지간히 수상쩍었다. 아마 일전부터 제 물건 중 하나를 미리 봐놓고 빼간 듯했다. 눈썰미라 할만한 태가 도는 놈이라야 단박에 떠오르지는 않았으나 유달리 날랬던 얼굴이라면야 얼핏 짚이는 듯도 했다. 그러나 아디리스의 의문은 다른 곳에 있었다.

 구태여 도둑질을 할 것이라면 딴에는 요긴해 보이는 물건을 훔치는 것이 맞을 터인데, 이 근처만큼은 금박 한 톨도 허투루 놓은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무지렁이라도 잡아 잡숫기 두려울 만큼 해괴한 꼴을 한 영사가 그릇마다 널려 있거늘, 이만한 위험을 감수하고도 가져가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지 그는 짐작가는 데가 없었다. 일전에 정리를 제대로 마쳤더라면 무엇이 빠졌는지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겠지만 당장은 마땅찮았다.  

 아마 한 번이 쉬웠으니 두 번도 쉬울 거라 생각지는 않을까? 문득 아디리스는 이 이름 모를 행적의 주인이 기어이 제 꼬리를 스스로 밟는 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어릴 때는 제 몫이나 간신히 빌어먹느라 이부자리 걱정에만 절절맨 적도 있었으나 의외로 그가 개구진 짓에 소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디리스는 두 개의 빈 항아리를 가져와 하나에는 목걸이를 비롯한 장신구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다른 항아리에는 의식용으로만 쓰이는 볼품없는 인장을 담고 뚜껑을 덮었다. 둘 중 어느 쪽 그릇의 아가리 속이 훨씬 더 위험할는지는 오로지 아디리스만이 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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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지의 골통이랍시고 대롱거리는 것이 정녕 나와 같은 구실을 할는지가 이제는 갈수록 의심스럽구나."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뇌까림이 등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그가 아무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자 사제는 또다시 무어라 중얼거렸다.

 "네 분수에 맞는 잠자리를 새로 찾아낸 것일 테지?"
 
얼핏 웃음기가 섞인 그 목소리에도 안나는 여전히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디리스는 그 꼴이 못내 우습기만 한 모양이었다. 잡내가 진동하는 진흙을 덕지덕지 바르고 주저앉은 사냥꾼의 모습은 마치 도롱이벌레의 집을 거꾸로 심어놓은 듯했다. 흙장난에 진이 죄 빠지기라도 했는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색색대는 것마저도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마저도 곧 재미가 다했는지 사제는 이내 발을 돌렸다. 사제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안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몰래 가져온 연고는 진작 동이 났다. 사제가 꼬박꼬박 약을 짓는 것도 아닌데다가 그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독한 가려움은 잠마저도 몰아냈다. 손마디에는 물집이 잡혔고 팔다리에는 부스럼이 일기 시작했다. 이대로 종일 몸을 긁어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늘한 흙이 닿으니 당장 시원하기는 했다. 마치 허물을 벗는 애벌레가 그러하듯, 안나는 이대로 몸을 뒤덮은 종창을 전부 뜯어내고만 싶었다. 

 결국 그는 또다시 사제의 영역으로 몰래 발을 들였다. 지펴진 지 오래된 모닥불의 흔적을 지나 안나는 제단 앞에 섰다. 일전에는 없었던 반질반질한 두 개의 항아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치 잘 익은 과일처럼 보이는 항아리 하나를 흔들어보는 데 정신이 팔려 주변이 이상스럽게도 깨끗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항아리 속에서는 무엇인가가 툭툭 굴러다니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는 무심히 뚜껑을 열고 손을 휘저어 소리의 정체를 끄집어냈다. 동그랗고 길다란 막대처럼 보이는 장식품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숲 너머에 살던 어린아이들이 으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닮은 그것을 안나는 조심스레 만지작댔다. 닳고 오래된 티가 나기는 하였으나 그는 꽤 흡족한 눈치였다. 이대로 슬쩍 허리께에 달기도 좋아봄직하여 안나는 무심코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낡았었던 모양이었는지 인장은 금세 돌가루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안나는 다급하게 손을 털어냈으나 그 안에 담겨있었던 듯한 액체가 손아귀를 적시는 것에 재차 당황하였다. 액체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역한 악취가 치솟았다. 설상가상으로 액체는 손에 난 상처를 따라 순식간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안나는 자리를 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신전 밖으로 빠져나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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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단 위에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둘 살피던 아디리스는 아쉬움에 침음하였다. 아마 어느 쪽을 먼저 고르더라도 도둑놈은 필시 괴로울 것이었다. 항아리에 넣은 목걸이와 허리띠의 안쪽에는 아교와 송진을 잔뜩 칠해두었고, 인장에는 그조차도 때론 쓰기를 망설이는 상한 구토제를 넘치도록 담아놓았다. 혹 맨살에 장신구를 둘렀더라면 종국에는 떼어내려다 피부가 벗겨질 것이었고 인장을 가지고 장난질을 했더라면 말 그대로 몇 날 며칠을 죽도록 앓을 것이었다. 아디리스는 이 정체 모를 도둑이 부디 제 예상만큼 탐욕스럽기만을 바랐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는 경과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그는 이만하면 만족하기로 했다. 조만간 누가 되었건 배를 쥐고 바닥을 구르는 꼴을 볼 수 있을 테였다. 

 빗물로 한참을 씻어댔으나 손바닥을 에는 듯한 쓰라림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뿐이면 모를까, 애초에 단단히 잘못되어 보라는 심보였는지 그 지독한 액체를 맨살에 쏟은 이후로 안나의 병증은 더욱 심해졌다. 숲에서는 더 이상 예전 같은 노랫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더께에 찌든 몸으로나마 애썼으나 얼굴을 쳐들 고갯심마저 앗아가니 그는 제 덩치를 통 가누지를 못했다. 성질을 부릴 기운조차 없어 벽에 등을 댄 채 멀거니 밖만 내다보던 중, 문득 매캐한 향내가 돌자 안나는 제 몰골을 감추려 급히 낡은 모포를 어깨 위로 뒤집어썼다. 

"당최 무슨 저지레를 했느냐?"

 지독한 곰팡내가 나는 모포에 싸인 그를 멀찍이서 흘기며 아디리스는 혀를 끌끌 찼다. 도저히 맥아리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까마귀마저 그 곁을 얼씬거리지를 않으니 모르는 이가 봤더라간 시체라도 눕혀놓았느냐고 기겁했을 꼴이었다. 씨근대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아디리스는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 갸우뚱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제 차례의 희생제에서 정작 그가 고대했던 행색을 보이는 이들이 없었던 탓에 아디리스는 다소 맥이 빠진 참이었다. 그런 이유로 느슨한 화풀이나 내뱉다 돌아갈 작정으로 들른 이곳에서 그는 의외의 단서를 찾아낸 것이었다. 

 "내 암만 노닥거렸기로서니 말이다."

 아디리스는 삐걱이는 마룻바닥을 밟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들 난데없이 네 일감이나 품앗이하는 처지로 전락한 꼴이 즐겁지는 않으니 이 억울함을 어찌 풀어야 하겠느냐?" 

 

 그의 인영이 가까워짐에 따라 안나는 차츰 움찔거렸다. 사제의 팔에 감긴 사슬이 덜그럭대는 소리가 어느덧 귓전까지 다가왔다.

 

 "딱 한 번만 추궁할 터이니 바른대로… 되었다, 여지껏 제대로 고하는 꼴을 본 적이 없으니 주억거리기라도 하거라. 알겠느냐?"

 

 안나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으나 그것을 긍정으로 적당히 넘겨짚은 아디리스는 향로를 들어 가려진 그의 얼굴 가까이 비추었다. 사뭇 엄숙해진 사제의 표정에 안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필시 그때렸다?"

 

 이제 그대로 머리통을 쥐어박히는 줄로만 알았으나 사제는 되려 무어라 반문하기만 했다.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한 눈으로 그 낯을 보고 있자니 마치 다 알아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구태여 꾀를 부려 드러누운 것이 아니라면 되었다. 내 억지로 책망하지는 않으마."

 

 아디리스는 드물게 너그러운 말씨로 중얼거렸다. 누군들 자신이 아픈 것은 남이 언질을 주기 전까지는 경과를 깨닫기 힘든 법이었다. 분명 옷을 제대로 갈아입은 적도 없을 테고 그렇게 온종일 젖은 흙바닥이나 뒹굴다 이 짝이 난 것이 분명했다. 

 종종 펄펄 나는 독사와도 드잡이하던 사냥꾼이 고작 그 정도로 앓아눕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었지만, 전신에 뜨끈한 열이 끼치고 종아리는 부스럼이 돋은 것을 보니 고뿔에 두드러기까지 제대로 얻어걸린 모양이었다.   

 

 "아무렴 말귀 없는 짐승이니 앓기는 더 섧지 않겠느냐."

 

 또 한 차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사제에 안나는 주춤하였다가 그가 불을 지피는 것에 그제야 안심하였다. 

 

 "그 몸뚱이를 싸매려거든 멧돼지라도 잡아 옷을 지어야겠구나." 

 

 낡은 피륙 따위를 모아온 사제는 그것을 차곡차곡 안나에게 덮어주었다. 그뿐으로는 모자랐는지 그는 이제 구석을 구르던 솥단지까지 어찌저찌 찾아내 불가에 걸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내 모시는 그분께 온 치성을 다 하느라 다른 배움을 마칠 시간이 다소 부족하였기는 하다. 그러나 그뿐이다. 물론 이는 네가 은혜를 입은 보답으로 마땅히 함구할지어다."

 

 말을 마친 사제는 본 적 없는 열매와 줄기 따위를 으깨어 물에 풀어내고는 그것을 그릇에 담아 안나에게 주었다. 냅다 혓바닥을 할퀴는 무지막지한 쓴맛에 안나는 잠시 콜록거렸다. 낫기는커녕 이대로 속에서 불이 나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드는 맛이었으나 안나는 곧이곧대로 사제가 내미는 약을 남김없이 마셨다. 당장에 어떤 약효가 생기리라는 기대에서는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사제가 그의 근처에 있으면 가려움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히려 전혀 다른 곳이, 손이나 이빨 따위로는 당최 긁어낼 수 없을 목 안쪽 깊은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다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부러뜨린 나뭇가지를 불길로 던져넣는 사제의 옆얼굴이 반쯤 감긴 그의 눈에 조용히 아른거렸다. 안나는 이대로 난롯불이 영영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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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로도 아디리스는 드문드문 그를 찾아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로, 그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사냥꾼은 열이 올라 끙끙 앓는 와중에도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지저분한 모포를 벗지 않으려 난리를 쳤다. 피차 없을 것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이제와서 무슨 내외라도 하겠답시고 내숭을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전번에는 또 어땠더라, 더는 모포의 묵은내를 참기가 어려워 억지로라도 뺏어내려니 핏발이 서도록 움켜쥐고 버티기까지 했었다. 예전의 성미라면야 진작 손지검으로 다스렸겠으련만 그 꼴이 어째 아이가 떼를 쓰는 모양새와 다를 바가 없는지라 아디리스는 그저 기가 찼다. 드디어 그만한 기운이 돌아온 것을 보니 이제는 제 손을 고생해가며 약을 달여줄 필요가 없겠다는 정도가 그에 대한 마지막 감상이었다.

 이미 더는 신전 구석지를 넘으면서까지 사냥꾼의 안부를 알은체할 이유가 전무하다는 것을 애써 부정해가며 아디리스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늘 그렇듯 있었을 법한 자리는 전부 둘러보았으나 역시 사냥꾼의 흔적은 없었다. 이윽고 아디리스는 그가 종종 비뚜름하니 몸을 일으켜 앉아 밖을 내다보고는 하던 위층 구석자리에까지 도착했다. 

 그곳에는 주인 없는 하얀 가면 하나가 덩그러니 나뒹굴고 있었다. 아디리스는 무심한 손으로 가면을 주워 바닥에 널브러진 모포 위로 던졌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그는 사냥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허탕이 한 손을 넘은 이후부터 아디리스는 갑갑함에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옛날 비럭잠을 자던 시절에도 이렇듯 종종 사라지는 이들이 있었다. 그럴 적마다 신도들은 몇몇 밤낮 무리를 지어 멋대로 쑥덕이곤 했다. 신탁, 순례, 계시… 지금이라면야 코웃음을 칠 일이지만 그때의 아디리스는 그런 일망무애의 이야기들을 죄 곧이곧대로 주워섬기곤 했다. 말마따나 신께서 그를, 혹은 그들을 필요로 하여 데려간 것이라 믿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사라지는 이들은 언제나 같은 이들이었다. 아프고 노쇠한, 남은 육신마저 닳아 신을 섬기기에 알맞지 못하게 된 이들은 그 무엇으로도 대접받지 못했다. 추종자들의 눈초리는 의심으로 물들고 사제들은 끝내 사람들을 몰아 그를 추방했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지체한들 본래는 일각이나 될까 한 거리가 분명했음에도 도저히 사냥꾼의 거처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같은 장소를 도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는 장소를 찾아 헤매는 느낌이었다. 또다시 헛걸음으로 괜히 진을 뺀 것이 못내 짜증스러웠던 그는 홧김에 빗속으로 왕관을 세차게 집어 던졌다. 

 이쯤이면 마땅히 무엇에라도 부딪혀 되돌아왔을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아디리스는 의아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왕관은 멀리서도 한눈에 띌 만큼 새빨간 웅덩이에 처박혀있었다. 아디리스는 그늘 속으로 점점이 이어진 웅덩이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갈수록 짙어지는 안개와 더불어 퍼붓는 비가 기어코 발목을 잡았다. 이내 휘청이는가 싶더니, 그는 그대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굵은 빗방울들이 앞다투어 전신을 때리는 것이 느껴졌다. 밀려드는 피로와 함께 얼얼한 무릎을 천천히 세워 일어나면서 아디리스는 불 꺼진 향로를 다시금 단단히 움켜쥐었다. 잠시나마 쉬어갈 번듯한 그루터기를 찾아 아래에 주저앉으니 이번에는 추위가 말썽이었다. 온 사방이 척척한 탓에 좀처럼 불을 지피기도 힘들었다. 

 "…이유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듣는 이 없는 한탄만이 빗소리에 쓸려 흩어져 갔다. 꼼짝없이 평생을 이고 갈 줄만 알았던 허물을 이제 와서 벗겨진 이유도, 제 몸 하나 멀쩡히 간수할 줄 모르는 멍청한 사냥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도 그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한참을 더 헤맨 끝에 간신히 신전으로 돌아온 아디리스는 곧장 돌바닥에 드러누웠다. 머리털 끝부터 얼어붙을 것만 같은 차디찬 바닥 위에서 그는 미처 본 적 없는 마른 부스러기를 발견했다. 아디리스는 급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것도 막 떨어진 것이 아니라 훨씬도 전에 마른 듯한, 분명 제가 아닌 다른 이의 흔적이었다.  

 그가 다녀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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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는 군데군데 진물이 밴 옷가지를 벗어냈다. 약을 뒤집어썼던 손은 손톱까지도 죄 빠져버렸다. 오른팔은 아예 고목처럼 거뭇하게 변했다. 종일 가려움에 몸부림치던 그때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 만큼 걸을 때도, 숨을 쉴 때도 온몸이 죽도록 아팠다. 밭은기침을 내뱉으며 안나는 한낱 죽어가는 벌레처럼 모로 누워 둥글게 몸을 말았다. 이제는 등줄기에 오른 종기 때문에 제대로 누울 수도 없었다. 

 그는 빈 솥단지를 곁눈질하다가 저만치 옷가지와 함께 벗어두었던 혁대를 찾아 몸을 기었다. 그리고는 혁대에 달린 주머니를 뜯어낼 생각으로 그것을 힘껏 끌어당겼다. 손때묻은 주머니 안에서는 보잘것없는 나뭇조각 몇 개가 굴러 나왔다. 마치 숲 바깥에서 데려온 아이들이 최후가 그러하였듯 안나는 그 투박한 장난감을 움켜쥐려 손을 뻗었다. 칠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엉성한 목마에 까맣게 그을린 손가락이 막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이렇듯 영악한 짓을 할 머리가 있을 줄이라고는 정녕 꿈에도 몰랐느니라."

 

 발가락 하나가 동강 난 발이 그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당장 똑바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연신 오금만 들썩거리는 그를 보며 아디리스는 성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한평생을 지니고 살았던 병증의 악취를 그새 잊을 것 같았더냐?"

 

 사제의 팔에는 여지껏 그렇게나 질색하던 제 모포가 한 아름 들려있었다. 그러나 대뜸 그것들을 전부 바닥으로 내던진 사제는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보름을 썩힌 비름 더미도 이보다는 나았다. 개천 옆에서 밤낮 이틀을 꼬박 태웠던 몸뚱이들도 이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사제는 무언가를 회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냥꾼의 흔적을 찾던 아디리스가 최후로 손댄 것은 그가 그렇게나 손에서 놓기 싫어하였던 모포 쪼가리였다. 털가죽에서 피어오르는 갖가지 지독한 악취 속에서 그는 가장 익숙한 냄새를 맡아낼 수 있었다. 너무도 선명하였기에 잊고 싶었던, 지금은 없었기에 더 쉽게 알아낼 수 있었던 흔적이 가득 배어있었다. 땀에 절어서도 한사코 난로의 온기에서는 멀어지려던 괴이한 짓거리를 비롯한 모든 일이 드디어 하나둘 아귀가 들어맞았다. 

 병증을 다룰 재간이 없으니 진흙 위를 구르고, 제가 준 약을 기억해낸 탓에 기어이 수난을 당하고, 결국에는 그가 가져야 할 증명마저 이렇듯 대신 뒤집어쓰고 만 것이다. 

 

 "지리하게나마 명을 이었기로서니 딱 하나, 처음 눈을 감은 그날부터 줄곧 잃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을 아느냐? 아니, 차라리 몰랐기에 잘도 그런 짓을 하였더냐? 이 몽매한 것아!"

 

 아디리스는 그렇게나 부르짖었던 믿음의 대가를 입고 스러진 육중한 몸을 하얗게 질린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손마디가 스친 자리로부터는 녹색 고름이 툭툭 터져 나왔다. 문드러진 살갗을 훑던 아디리스가 또다시 중얼거렸다.

 

 "한낱 천치로서는 읊지 말았어야 할 바람이었던 게다."

 

 저더러 들으라는 것인지 혹은 본인에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뱉는 사제를 안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사제를 향해 별안간 무어라 내지를 뻔도 하였으나 곧 까맣게 가려지는 시야에 안나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때마침 운나쁘게도 눈을 깜박이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사제의 낯선 표정이 그에게만큼은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늘을 드리운 손가락 사이로 안나는 아무것도 훔쳐볼 수 없었다. 어느새 빗소리마저 사라진 오두막에는 꿈틀거리는 적막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어둡고 불쾌한 공기가 삽시간에 몸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도 서운했는고?"

 

 빗소리보다도 또렷한 음성이 그의 의식을 깨워냈다. 직전 찰나의 기분 나쁜 고요가 거짓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사제는 눈앞에서 보란 듯 부싯돌을 튕기는 중이었다. 게다가 저는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빈손을 내밀며 그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었다. 

 

 "갈수록 뻔뻔하도다. 고작 그새를 못 견디는 것이냐?"

 

 안나는 그제서야 뒤늦게 제 팔다리를 훑어보았다. 그러자 사제의 반쪽 얼굴이 그를 향해 이죽거렸다. 그는 곧장 고개를 저어 보였다. 

 

 "…."

"애시당초 네 것도 아니잖느냐."

 

 이번에도 얼굴을 가로젓자 사제가 더욱 수상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는 도통 불이 당겨질 낌새가 없는 돌쪼가리를 번갈아보고서 도로 말을 이었다.

 

 "헌데 퍽 이상스럽기도 하다. 본래 네 하던 꼴과 다르지는 않으나 마치… 지금은 꼭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또다시 꼭 맞게 움직임이 멎자 사제가 당황하여 오른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안나는 그가 흘린 부싯돌을 도로 주워 장작에 불을 붙였다. 지붕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안나는 느지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무래도 그가 또다시 저를 채근해올 때까지는 전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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