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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일탈

그림 : 칼훈님(@calhun_dbd)

​글 : 뚜뚜르님(@BlackMalangKate)

 

 

 

 

 

 군단, 어쩌면 보수적인 마을의 분위기를 무너뜨리고 싶어 했던 마을의 작은 혁명가이자, 어쩌면 평화를 인질삼아 일탈을 감행했던 10대들이었다. 그들은 마을의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오르몬드의 자동차 앰블럼을 뜯어내곤 했다. 그리고 조이가 일하던 철물점 사장을 그들의 손으로 끝냈던 날, 수지의 손에 처음으로 피 묻은 칼이 쥐어진 날, 그리고 갑자기 사라진 프랭크를 찾아 안개가 가득한 숲속으로 줄리의 손을 꼭 잡고 따라 들어갔던 그 날. 그 날이 그들 모두가 엔티티의 저주에 사로잡힌, 수지가 이제 와서 가장 후회하던 날이었다.

 

 

 

 의식이 수지에게 깃들었다. 어둠 속이었다. 눈을 뜬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이 어둠이 차라리 편했다. 수지는 무한의 고요함과 정적속에 자신을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느끼고 만 것이었다. 어디론가로 정신을 잃듯이 끌려가는 느낌. 이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을 증오해왔다. 몽롱함과 어지러움, 혼란스러움을 헤쳐내고 자아를 끌어모아 억지로 눈을 뜰 때면...

 

 

 

 “...망할.”

 

 

 

 시각보다 먼저 반응한 감각은 촉감이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후드티와 가면 사이로 살이 에리는 듯한 찬 공기가 수지를 맞이했다. 그제야 수지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새하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날숨과 함께 하얀 입김이 가면사이로 새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익숙한 장소는 -그래서 수지가 더 불쾌할 수 밖에 없었던-오르몬드의 산 리조트였다. 그들이 이 곳 세계로 끌려오기 전, 다른 동네의 스키마을에 밀려 폐허가 되어버린 그들만의 아지트이자 소중한 공간이었다. 비록, 지금 수지의 눈앞에 놓인 이 그리운 풍경은 엔티티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지만.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에 손을 바라보니 언제부터인가 서바이벌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어느덧 굳어서 적갈색을 띄고 있는 핏자국을 보자니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엔티티의 명령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들을 희생시켜라. 엔티티가 굶주렸다!’

 

 

 

 명령인지, 세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속삭임의 수지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언어로 이루어진 게 아닌, 필멸자들의 꿈과 상상속에서 의식을 사로잡은 안개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이런 비윤리적인 살인행위와 포식자의 입장에 서 있다는 우월감,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느껴지는 두려움, 희열감, 공포, 배덕감, 분노가 어우러지는 순간을 아주 짧게나마 즐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엔티티는 그들의 수하들이 인간의 감정을 즐기도록 허락해주지 않았다. 엔티티는 인간의 모든 감정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두 삼켜버리는 존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지의 감정들은 희미해져갔고,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의 불꽃을 모두 꺼뜨렸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희생제의 깊은 고독과 공허함이었다. 수지는 이 무한의 살육과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수지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차가운 바람 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엔티티가 만들어 낸 세계 속에서 그것의 눈을 피해 보는 시도는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수지는 그 정적을 잠시나마 허락된 자유라고 믿어버리고 싶었다. 잠시 망실이던 수지는 결심한 듯 가면을 고쳐 쓰며 오르몬드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거짓된 익숙함이 느껴졌다. 리조트로 들어서자 그리웠던 1층의 소파, 난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을 보며 추억에 잠기는 건 이미 너무 지겨울 정도로 해왔기에 수지는 감상에 젖는 대신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것을 선택했다. 낡은 소파였지만 짧은 일탈장소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어차피 생존자들은 자신이 이 곳에 있으면 리조트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흔적을 숨겨버리거나 바퀴벌레마냥 도망가곤 했으니까. 수지는 그저 어떻게 작동되는지 원리를 알 수 없는 발전기들을 지지고 볶아서 그들이 빨리 꺼져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엔티티의 반응은 그다음 문제였다.

 

 

 

 수지는 간만의 자유를 확실히 만끽하기 위해 손에 쥐어진 나이프를 후드티 안에 넣은 뒤 가면도 벗어버렸다. 작은 조각들을 실로 한땀 한땀만들어냈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만큼은 만나지 못한지 한참 된 친구들과의 소속감보다 상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훅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더 중요했다. 수지는 가면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녀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탈은 짜릿했다. 이런 감정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지, 수지는 이 감정을 빼앗기기 전에 실컷 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지는 눈을 감고 난로에서 튀어 오르는 장작소리는 듣기로 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탁탁 소리에 정신이 홀리는 듯했다. 물론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이, 신입이야? 여기서 이렇게 농땡이 치고 있으면 모를 줄 알았어?”

 

 

 

 평화로운 규칙을 깨고 불쑥 들어온 한 남자의 목소리에 수지는 짜증이 팍 치밀었다. 순간적으로 주머니 속의 칼을 손에 쥐고 싶었지만 수지는 용케 눈을 부릅뜨는 것에서 그칠 수 있었다. 운동이라도 한 것 같은 큰 체격의 사내가 다소 건방진 표정으로 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수지는 그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다. 통성명을 할 사이는 아니었으니 이름은 모르지만, 이 남자와 여러 차례 추격전을 벌인 기억이 났다. 비범한 신체능력으로 수지를 몇 번이나 애먹이는 바람에 엔티티의 불만족을 사게 한 근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지도 희생제에 익숙해져 가며 그의 다소 산만한 성격과 움직임의 약점을 깨닫고 이제와서는 비등비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 이 인간이 여기 왜 있는 거지?

 

 

 

 “...뭐야. 넌?”

 

 

 

 퉁명스러운 말투가 절로 튀어나왔다. 개인적인 원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상반된 목표를 가지고 경쟁하듯이 지내온, 먹잇감에 불과했던 이에게 수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 곳에 처음 왔으면 신입이지. 처음 본 얼굴인 것 같은데?”

 

 

 

 “...처음 봤다고?”

 

 

 

 남자의 말을 들은 수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얼굴을 보는 자신의 시야가 훨씬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가면을 벗은 수지의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엔티티들의 수하와 다르게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자신을 자신과 같은 생존자라고 착각한 것이라는 것에 눈치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수지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수지는 포식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덩치만 큰 멍청한 먹잇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고민의 순간이 무색하게 남자는 소파에 앉아있는 수지의 팔을 우악스럽게 들어 올렸다. 괴팍할 정도로 무식한 행동에 수지는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뭐야, 미쳤어?”

 

 

 

 “아, 그래. 알았어. 알았어. 다들 처음 왔을 때는 그래. 나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거든.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부터 내거나 징징짜기부터 하거든. 물론 나는 그러지 않았지만.”

 

 

 

 당황스러워하는 수지의 표정을 뒤로 한 채,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수지의 팔을 잡아 난로 옆의 발전기로 끌어당겼다. 마치 극기 훈련에 처음 온 훈련생을 어르고 달래는 듯한 말투, 그리고 은근슬쩍 빠지지 않는 자기자랑에 수지는 어이를 잃어버렸다. 악에 받쳐서 죽일 테면 죽이라고 나오는 생존자들은 만나본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일방적인 엔티티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날 것에 가까운 인간들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먹잇감의 당돌한 태도에 수지는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수지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발전기에 붙어 끊어진 전선을 만지기 시작했다.

 

 

 

 “잘 보라고. 이렇게 생긴 걸 우리는 발전기라고 하는데, 앞으로 눈을 뜨면 그냥 이렇게 생긴 것부터 찾아. 알았어?”

 

 

 

 “...”

 

 

 

 “뭐야 그 얼띤 표정은? 그런 표정으로 있으면 살인마한테 가슴 뚫려서 죽기 딱 좋네. 정신 차려 임마!”

 

 

 

 살인마에게 가슴이 뚫려? 내가? 네가? 수지의 멍한 표정에 데이비드는 수지의 눈앞에 손가락을 크게 튕겼다. 딱, 하는 소리에 수지의 눈에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수지에게 이 상황을 납득 시킬 수는 없어 보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인마. 이 곳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다짜고짜 아무 이유 없이 너를 죽이려드는 살인마도 있단 말이야. 뭐, 지금은 구석에 짱박혀있는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방심하면 거미다리에게 승천하기 딱 좋거든.”

 

 

 

 “...”

 

 

 

 “그리고... 대충 이렇게 전선을 비비다 보면... 대충 어떻게든 되더라. 계속 이 짓을 반복하다 보면 문을 열 수 있는데, 그거 열고 나가면 돼. 이해했지? 이제 빨리 너도 여기 붙어.”

 

 

 

 남자의 명령조에 설명을 수지가 잠자코 듣고 있을 수 있던 이유는 이 순진할 정도로 멍청한 생존자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갈고리에 걸어 버릴까 하는 충동과 간신히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오늘 결심한 일탈과는 거리가 먼, 엔티티의 규칙을 따르는 또 다른 방법이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수지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수지는 자신의 기발한 지능에 감탄하며 재빨리 발전기에 붙어 눈에 보이는 아무 전선을 주워들고는 남자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어어, 그래. 근데 너무 대충하면 발전기 터진다?”

 

 

 

 찰칵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발전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수지는 남자를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살인마가 온다는 건 어떻게 알아차리는 거야? 소리가 들려?”

 

 

 

 “보통 그 놈들이 주변에 오면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하고 심장이 가만히 있질 않더라고. 인간의 생존본능인지, 육감같은건지. 알게 뭐람. 물론 그런 게 느껴지지 않는 위험한 놈들도 있으니까 조심해. 특히 하얀 가면 쓴 놈들.”

 

 

 

 “아아... 심장이 뛴다는 거지? 살인마들이 다가오면?”

 

 

 

 “대충 그런 거지. 절대 겁먹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게네들이 무기만 없어도 전부 내 주먹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수지는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이 남자가 왜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뻗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느끼는 심장 소리는 자신의 살의(殺意)와 관련있었다. 생존자들은 자신이 그들을 죽여야한다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다가갈 때를 느끼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탈을 결심해 살의가 느껴지지 않는 수지를 생존자로 느꼈던 것이었다.

 

 

 

 이렇게나 안일할 수가.

 

 

 

 수지는 이 덩치만 큰 생존자에게서 정보를 빼내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가끔 무력하게 3명의 생존자들 앞에서 갈고리에 걸린 생존자를 ‘지키는’ 일에 가까운 짓을 하다 보면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먹잇감들의 행동패턴을 알아두면 이 일탈이 끝난 다음에 엔티티에게 처벌받는 일은 없을 터였다. 사실 반칙에 가까운 짓이었기에 엔티티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뭐, 애초에 이 현실이 이 곳의 모두에게 부조리했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수지는 본격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생존자 흉내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흉내를 내는 건, 특히나 군단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만약 살인마에게 잡히면 어떻게 돼?”

 

 

 

 “돌아다니면서 정육점에서나 볼 것 같이 생긴 갈고리들 몇 개 봤지? 살인마들이 거기다 걸어버릴 거야.”

 

 

 

 “와 정말? 많이 알고 있네. 그거...아프겠다...?”

 

 

 

 “네가 당할 수도 있는 일인데 무슨 태평스럽게 아프겠다, 이러고 있냐? 게다가 거기에 너무 오래 걸려있으면 뒈져.”

 

 

 

 “똑똑하다! 그럼 살인마가 앞에 있을 땐 어떻게 살려?”

 

 

 

 “그 친구 빨리 죽이고 싶으면 갈고리에서 꺼내주던가. 빌 할배 데려와서 살리거나 다른 사람들 데려와서 살인마랑 눈싸움해야지.”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도 모르는 채 남자는 칭찬에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생존 전략은 물론 자신의 정보까지 술술 불고 있었다. 수지는 교묘한 질문을 통해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생존자들의 행동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발전기를 더 빠르게 돌리는 방법, 심장 소리가 들릴 때 숨으면 좋은 장소, 갈고리에서 꺼내진 직후의 60초의 소중함, 엔드게임의 위험성. 군단의 살해 방식은 항상 이러했다. 다른 살인마들에 비해 약한 완력과 기술을, 그들은 역으로 생존자들의 행동을 이용해 극복해내곤 했다. 수지의 숨겨진 미소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수지가 비행기를 띄워줄 때마다 엣헴하면서 희생제 선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려는 듯했다. 그 오만함이 결국에 그를 파멸로 이끌테였지만. 덕분에 수지는 얼마지나지 않아 이 남자의 이름이 데이비드 킹이라는 것과 함께, 럭비를 그만둔 뒤 펍에서 다른 사람들과 쌈박질을 하다가 엔티티의 저주 속으로 끌려온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소소한 흥밋거리는 되는 듯했다. 수지는 오르몬드에 울려 퍼지는 발전기 수리 소리와 함께 적당히 맞장구나 치다가 이번 희생제를 끝낼 계획이었다. 엔티티에게 처벌받아도 상관없었다. 그 처벌에 상응할만한 좋은 정보를 많이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넌 이름이 뭐야?”

 

 

 

 “내 이름?”

 

 

 

 “앞으로 종종 만나게 될 텐데, 계속 야, 야라고 불렀으면 좋겠어? 뭐, 그것도 상관없지만.”

 

 

 

 자신의 암묵적인 승리를 내면으로 누리고 있을 때 순식간에 들어온 질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수지는 당황한 듯 되물었다. 찰나의 시간에 수지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줘도 괜찮은가? 그들이 내 이름을 알아도 아무 운명도 바꿀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수지라고 해.”

 

 

 

 수지는 짧은 고민 끝에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어차피 앞으로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일은 없을 것이고, 데이비드에게서 알아낸 정보만큼 자신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겠다는 소소한 보답이었다. 물론 그것을 데이비드가 알 수는 없었다.

 

 

 

 “수지? 부르기엔 어렵지 않은 이름이네. 어쩌다가 이곳으로 떨어진 거야?”

 

 

 

 “...친한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모든 게 바뀌어 있더라.”

 

 

 

 “친구? 좋지. 어떤 친구들이었는데?”

 

 

 

 “...두 명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였고, 한 명은 새롭게 무리에 들어왔어. 근데 프...아니, 그 친구가 들어온 이후로 우리들이 노는 방식이 좀 달라졌지. 평소에는 상상 속에서만 할 수 있던 일탈을 그 친구들이랑 함께였을 때는 내 손으로 할 수 있었거든. 근데 이제는 다 부질없어.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거든.”

 

 

 

 수지는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는 오르몬드의 친구들을 기억해보려 애를 썼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오르몬드에서의 수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 자체를 버거워 했다. 그때는 그저 줄 리가 하자는대로, 조이가 가자는 곳으로, 그리고 프랭크가 계획하는 대로 움직이는 게 그녀의 낙이었다. 수지는 다른 또래와는 다른, 독특함을 넘어선 그들의 결속력에 속해있음을 즐겼다. 그렇기 때문에 프랭크가 조이의 철물점 사장의 숨통을 끊어놓는 순간에 자신의 마음 한 켠이 부르짖는 무언가의 외침을 무시할 수 있었다. 이 기억, 마지막으로 언제 했었더라. 내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수지는 잠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일탈? 좋지. 그거.”

 

 

 

 “?”

 

 

 

 수지는 일탈이라는 단어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데이비드에 살짝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일탈이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내 일탈은 살인이라고, 사람이 죽고, 다치는 네가 생각하는 그 어떤 것 이상의 일이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삼켜내는 것에 성공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일탈이라는 건 – 네가 인생을 재미있게 살았다는 뜻 아니겠어? 답답하게 규칙만 지키는 삶은 꽉 막혀서 재미없잖아.”

 

 

 

 “...”

 

 

 

 “자세한 걸 묻기에는 잔뜩 추억에 잠겨있는 표정이네. 걱정 마, 이 미친 짓도 언젠가는 끝이 있겠지. 나도 처음에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장소에서 혼란스러웠거든.”

 

 

 

 어딘가 모르게 확신에 차 대답하는 데이비드의 말이 수지는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뭐라고? 너는 엔티티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을 텐데. 수지는 데이비드를 눈치채지 못하게 사나운 눈빛으로 한번 쏘아보았다. 괜스레 기분이 묘해졌다. 이 머릿속 전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만 같은 남자의 말을 왜 믿고 싶은지 설명할 수 없었다. 역시 처음부터 괜한 정보를 말한 느낌이었다. 수지는 이 기묘한 기분이 전부 괜한 기억을 떠오르게 한 데이비드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것도 일탈이라면, 그건 어떻게 생각해?”

 

 

 

 왜 스스로도 그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생존이 얽힌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이 장소에서 먹잇감에게 질문하고, 원하는 대답을 얻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녀의 과거를 일탈이 아닌 응원으로 받아준 이 존재에게 무슨 말인지를 듣고 싶어졌다. 이 조마조마한 심정을 엔티티가 눈치채지 못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 다 돌아갔나보네.”

 

 

 

 희생제 전체에 울려 퍼지는 긴 알림소리. 발전기 5개가 전부 돌아갔다는 의미이자, 수지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였다. 원래대로였다면 이제 생존자들과 2차전을 시작해야한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오늘은 확실히 운이 좋네, 봤지? 이렇게 첫 번째 위기에서도 넌 운 좋게 살아남은 거잖아. 원래 첫 번째는 다 가슴도 뚫려보고, 징그럽게 생긴 거미다리에게 끌려가보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하루종일 그 죽상짓는건 그만두라고 수지. 와닿을지는 모르지만, 희망이라는 걸 가져보라고.”

 

 

 

 데이비드가 손을 툭툭 털면서 발전기에서 일어났다. 희망. 그래서 엔티티가 이들이 아무리 죽어도, 나에게 칼을 찔리고, 반으로 갈라져서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죽더라도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는 거였구나.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불쾌함에 가까운 질투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 원인일지도 몰랐다. 수지는 얼떨결에 데이비드를 따라 일어났다.

 

 

 

 “원래대로라면 2개의 출입구를 따서 빨리 나가버리는 게 안전하지만... 오늘은 살인마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 같으니까... 그러면 오늘의 희망을 시험해볼까?”

 

 

 

 데이비드는 갑작스레 발전기 옆에 놓여있던 나무로 된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잘 봐둬 수지. 여긴 이렇게 곳곳에 상자가 있거든? 그걸 이렇게 열심히 뒤져보면...”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데이비드가 열심히 상자 속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수지는 그 상자가 늘 희생제의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진짜 운이 좋네. 이것 봐. 수지. 이게 바로 희망이라는 거지.”

 

 

 

 데이비드가 상자 속에서 꺼낸 붉은 빛 열쇠를 꺼내며 말했다. 수지는 그 열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희생제에서 대체 왜 만든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상탈출구를 열 수 있는 열쇠. 저 열쇠 때문에 엔티티에게 처벌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순간 데이비드의 손에서 열쇠를 빼앗아 단번에 부러뜨려버리고 싶은 욕구가 잠시 치밀었지만 어찌어찌 참는 것에 성공한 수지였다. 그때, 다시 한번 희생제 전체에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엔티티가 만들어낸 엔드게임을 알리는 소리. 오르몬드의 땅이 붉은 빛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엔드게임은 2분내로 모든 것을 정리하라는 엔티티의 마지막 경고였다.

 

 

 

 “나머지 녀석들은 알아서 나갈 생각인가 보네. 따라와, 수지. 이 희생제에서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희생제에서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것. 수지는 데이비드를 따라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이 신나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닌 듯했다. 이 희생제 속에서 절망과 공포 이외의 감정을 느끼는 건 오랜만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데이비드가 마침내 멈춰 섰다. 마치 철제 뚜껑처럼 보이는 비상탈출구의 앞이었다. 수지는 여전히 조용히 데이비드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우리가 말하는 개구멍이라는 건데, 이 희생제에서 단 한 사람만 살아남을 때 열리는 목숨 보전줄 같은 거야. 하지만! 내가 누구냐, 이렇게 상자에서 열쇠를 뽑을 수 있는 행운아란 말이지. 한 명이 남지 않아도 이렇게 열쇠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열쇠를 들고 있는 데이비드는 신나게 설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갑작스럽게 열린 비상탈출구에 그 설명을 끝마칠 수 없었다. 비상탈출구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그 정적을 메꾸고 있었다. 수지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어쩌면 냉정하다고 할 수 있는 표정으로- 데이비드의 앞에 서 있었다.

 

 

 

 “어...이게 원래는 한 사람이 남아야지 자동으로 열리는...데...”

 

 

 

 데이비드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누가 열어놓고 간 것도 아니고, 비상탈출구가 스스로 열렸다는 뜻은 단 한 가지의 사실만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 희생제에 남은 생존자는 데이비드 한 사람이라는 것. 그렇다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수지...너?”

 

 

 

 뒤늦게 엄습한 진실에 데이비드는 지금까지의 의기양양했던 표정 대신 불안감이 깃든 얼굴을 들어 수지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표정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다리를 들어 한번 내리찍으면 닿아버릴 수 있는 비상탈출구,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가 그들을 옥죄여오던 그 살인마임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한 어리석은 사냥감. 잊어버렸던 희열이, 절망과 지루함에 묻혀 잊었던 기쁨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수지는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수지?”

 

 

 

 “희망이고 자시고를 논하기 전에 먼저 옆에 있는 사람부터 의심하도록 해. 데이비드 킹.”

 

 

 

 수지는 (데이비드 입장에서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고는 그대로 데이비드의 등을 밀어버렸다.

 

 “?, 으, 으악!!”

 

 

 

 말을 채 잇지 못한 채 데이비드는 끝을 알 수 없는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지는 데이비드가 사라진 구멍을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상관없어, 엔티티에게 처벌받아도. 어차피 각오한 결과였고, 그녀가 선택한 일탈이었다. 빠르기도 하지. 수지는 어느새 그녀의 어깨를 조여오는 엔티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명에 대한 방생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 수지는 두 눈을 질끔 감았다. 각오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 속의 고통을 찾아오지 않았다. 오로지 오르몬드의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맨 얼굴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왜일까, 왜 엔티티는 그녀를 벌하지 않은 걸까, 변덕쟁이기도 한 이 악마가 수지의 새로운 감정, 어쩌면 희망에 가까운 무언가를 마음에 들어 한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어둠이 그녀를 덮쳐오며 의식을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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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이었다. 눈을 뜬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어둠. 무한의 고요함과 익숙한 정적 속이었다. 하지만 수지는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손을 뻗고 있는 걸까? 기억을 뒤져보는 걸까? 곧이어 어디론가로 정신을 잃듯이 끌려가는 느낌이 느껴졌다. 수지는 한층 더 익숙해진 혼란스러움을 헤쳐내고 자아를 끌어모아 눈을 떴다.

 

 

 

 “오르몬드...”

 

 

 

 향수감을 느끼게 하는 새하얀 풍경이 그녀를 반겼다. 다시 한번 희생제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엔...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수지는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낯선 종이자락을 들어 올렸다. 까맣게 그을린 그들, 군단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수지는 이제와선 기억나지 않는 미소를 가득 짓고 있었다. 엔티티에게 바치기라도 하려 했던걸까, 싶었지만 희생제가 시작되기 전의 기억은 무의식속에서 산산이 흩어져버리기 마련이었다. 수지는 왜 자신이 오르몬드로 돌아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수지가 기억하고 싶었지만 엔티티가 그 기억마저 지워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지는 가면을 고쳐 쓰고 칼을 다시 들어 올렸다. 무한의 굴레 속, 그녀가 찾아온 오르몬드의 이유를 찾기 위해.

설명&후기

칼훈님:

-설명

페어 뚜뚜르님의 <백색의 일탈>을 읽으며 수지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적막하면서 차분한 눈 내리는 오르몬드 산장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끝도 없는 엔티티의 공허 속에서 생존자 데이비드가 수지가 살인마인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서로 일탈, 희망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 수지는 어떤 생각을 하며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후기

@_@ 사실 데이비드+수지 조합으로 참여하게 될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ㅋㅋㅋㅋ 관리자 분께서 갓글작가 뚜뚜르님과 데비수지 조합으로 연결을 시켜주셔서 어쩌다보니 최애 조합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흐흐 덕분에 뚜뚜르님의 갓데비수즤 글 연성을 읽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네요!! 오랜만에 그리는 그림이기도 하고 처음 시도해보는 스타일로 그려봐서 여기저기 작업하는 동안 꽤나 애먹었지만 어찌 완성했네요! 아무쪼록 합작 개최해주신 관리자분들께 이런 멋진 기회 가질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긴 글 쓰느라 창작의 고통을 겪으셨을 뚜뚜르늼도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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