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reening
그림 : 빌루님(@BILU511)
글 : 도우님(@dowo_Dough)
지긋지긋한 안개.
자리나는 중얼거림과 동시에 진흙탕에 발을 묻으며 발전기 앞에 쪼그려 앉았다.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듯이 이 무릎 아래에서 넘실거리는 지겨운 물결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손에 습기를 묻힐 뿐,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자리나는 짜증을 내며 연료가 새어 나오는 호스를 연결하는 것에만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손등으로 흐르는 검은 연료를 털어내며 자리나는 발전기 뒤로 시선을 흘긋 던졌다.
굳게 닫혀있는 저 문을 열기 위해 두 개의 발전기만이 남았다. 눈을 뜨고 이곳에 대해 파악을 완료했을 때, 건물을 밝힌 발전기 하나. 드와이트의 비명이 두 번째로 울려 퍼졌을 때 자신과 빌이 수리를 마친 발전기 하나. 클로뎃의 치료를 마쳤을 때 조명이 켜지는 소리로 나뭇잎들을 떨리게 했던 발전기 하나. 그 후 드와이트의 흔적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이 시점에서 자리나는 빌과 함께 발전기를 수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위안 아닌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손을 휘저으면 물이 묻어나올 것만 같은 이 날씨에, 빌의 날숨에 섞여 흩어지는 건조한 담배 연기 역시 자리나의 정신을 붙들어 놓는 고마운 존재 중 하나였다.
“누수는 거의 잡았어요. 접속 불량인 전선들도 다시 연결했고.”
자리나의 말에 발전기에 코가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빌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담배를 문 입으로 미소지었다. 그 사이, 자리나는 가깝게 다가온 연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수리도 마무리되어가는데, 다음 발전기를 봐둔 곳이 없어요.”
빌은 발전기 위를 초조하게 돌아다니는 자리나의 손을 가볍게 툭 치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클로뎃이 찾아낼 게다. 안개 속에 숨어있는 놈이 누구인지도 봤었을 거야.”
침착을 요구하는 빌의 시선에 자리나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수리에 집중하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렇겠죠. 바라던 대답에 굳은살과 습기로 짓물러진 울퉁불퉁한 손이 자리나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자리나는 다시 호스에 신경을 쓰려 노력하며 생각에 잠겼다.
클로뎃.
몇 분 전, 자리나와 빌, 클로뎃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맥밀란의 사유지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들과 함께 어떤 것의 숨결에 포장된 이곳은 더 이상 사유지도, 농장도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의 놀이터로 변모한 저주받은 땅일 뿐. 각자 이 땅에 던져졌을 때, 그들의 귀에 쉼 없이 속삭였던 좌절감은 클로뎃의 등에 새겨진 큰 칼자국을 치료하기 시작하며 입을 다물었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오기로 무장한 한 생각이 어두운 곳에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뜻대로 놀아나지만은 않겠다. 이것이 생존자들에게 남아있는 한 가닥의 목표였다.
치료를 마치고, 클로뎃은 방금 가슴속에서 기상한 호승심으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멀리 신기루처럼 흔들리는 건물을 가리키며, 높은 곳에서 발전기의 위치를 파악하겠다고 말하는 그의 손가락에는 공포가 느껴졌지만, 빌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희망을 불어넣었다. 자리나 역시 작은 판잣집에서 만나자며 재회를 기대하는 약속을 건넸다. 클로뎃은 그들의 응원을 받으며 안개에 녹아들고 있는 건물로 향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묻은 클로뎃의 피를 탐하기 위해 달려드는 안개 때문일까. 자리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손에 남은 찝찝함에 연신 주먹을 쥐었다 피고 있었다.
다리를 기어 올라오는 끈적임 때문인지, 머리를 괴롭히는 클로뎃의 뒷모습 때문인지. 자리나는 밀려오는 불쾌함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담배 연기로 한결 가벼워졌던 머리를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빌은 그런 자리나를 곁눈질하고는 발전기의 가장 안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틱. 틱. 거슬리는 소리가 두 번 난 후, 발전기 위로 높이 솟은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동시에 종이 울리듯 둔탁하면서도 맑은소리가 두 명과 주변 풀들을 휩쓸며 지나갔다. 발전기의 울림이 사라지려 할 때, 찢어지는 비명이 나무 사이로 들려왔다.
그의 비명은 큰 집 방향에서 들려왔다. 소리의 위치가 파악되자마자 자리나는 웅덩이에 큰소리를 내며 그곳을 향해 한쪽 발을 내디뎠다. 빌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은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가만있어.”
“클로뎃의 비명이에요!”
자리나와 빌은 아직 안개의 품 안에서 솟아오른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빌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가볼 테니 발전기를 찾아.”
“발전기요? 지금 이 상황에!”
“지금 같은 상황이니 더욱 발전기가 중요해!”
네 명 중, 한 명은 위로 올라갔다. 두 명은 아직 정체 모를 땅 위에서 숨 쉬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자리나는 빌의 말을 이해하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드와이트는 세 번째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클로뎃의 이 비명도 두 번째. 희뿌연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누군가는 놀이터의 주인에게 두 번째 선물을 바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운이 좋다면 빼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빌은 시계를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운이 좋지 않아서 내 목소리가 들리게 된다면. 발전기에서 손을 떼도록 해.”
자리나는 그 말에 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빌은 가슴 안주머니에서 색이 바랜, 구부러진 열쇠를 꺼내어 자리나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신중해야 할 때가 아니라 신속해야 할 때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빌 역시 이층집으로 향했다. 자리나는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열쇠를 움켜쥐었다. 감성에 젖어있을 시간은 없다. 일 초라도 빨리 문을 찾거나, 열어야 한다.
달려가던 빌의 뒤로 검은색의 일렁임이 일었지만, 그녀의 장난에 시선을 둘 여유조차 자리나에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
마지막 발전기. 둔한 떨림이 빛과 함께 울려 퍼졌다. 출구에 전기가 공급되고 있다는 시끄러운 알림 역시 하늘 곳곳에 퍼져나갔다. 자리나는 판잣집 뒤에 위치한 녹슨 손잡이를 내리며 문 틈새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고 느꼈다. 이제 이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 차례로 붉게 빛나는 조명을 보며 비명에 밀려났던 희망이 다시 자리나의 마음속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남자의 갈라지는 비명.
빌이다.
자리나는 손잡이에서 손을 놓고 뒤를 바라보았다. 비명은 클로뎃의 비명과 같은 곳에서 들려왔다. 문은 열렸다. 자신에게는 그가 주고 간 열쇠도 있었다. 자리나는 주머니 속 열쇠와 부딪히던 작은 녹음기를 만지작거리다 불길한 흰색의 신기루를 향해 발을 뗐다.
***
문제의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들의 잔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리나는 그 사이사이에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집으로 향하는 방향에는 옛날 동화를 떠올리듯 까마귀의 검은 깃털들이 길을 알려주듯 흩날리고 있었다. 자리나는 깃털들을 따라가다, 창문이 있었을 네모난 틀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다 가라앉는 것을 포착했다. 빌의 마지막 뒤를 따랐던 그 일렁임이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아니었나? 자리나는 숨을 죽이고 근처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바람이 일지 않는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바위 뒤로 지나갔다. 두꺼운 가죽이 끊임없이 펄럭이는 소리. 붉은 안광은 없었다. 기쁨이거나 흥분, 분노이거나 또는 이 모든 것이 분출되는 비정상적인 심장 박동 역시 들리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은 자리나가 잘 알고 있는 그의 특징이었다.
고스트 페이스.
그가 바로 안개에 숨어있던 그림자였다.
내내 눈치채지 못했던 이 의식의 제사장은 집에서 세 번째 제물을 끌고 나오는 중이었다. 고스트 페이스는 바위를 지나쳐 한 두꺼운 나무 밑에 숨이 멎은 빌을 던져두고는 허리를 폈다. 자리나는 흙탕물이 튀는 소리에 자세를 움직였다.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잘 보이도록. 자리나의 손은 예전 건조했던 달빛 아래에서 그랬듯이 주머니의 녹음기 버튼을 눌렀고, 진흙으로 얼룩진 장화도 주인의 호기심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호기심은 자신의 밑에 작은 나뭇가지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자리나는 호흡조차 멈춘 채, 고스트 페이스를 바라보았다.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는 분명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스트 페이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짧은 나이프를 달빛에 씻기듯 돌리며 흙바닥에 기괴한 자세로 눕혀져 있는 빌의 시체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자리나는 멈췄던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그 순간, 안개 속으로 스며든 날숨이 기폭제라도 되듯 고스트 페이스는 빠른 속도로 시체의 어깨를 향해 칼을 내리꽂았다. 그 동작을 지켜보던 자리나는 시체에서 나는 끈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람으로서 눈앞의 반인륜적인 행위의 끔찍함에 눈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몸에 익은 예전의 습관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는 손끝에 익숙한 흥분이 스쳐 갔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원형의 버튼을 눌렀다. 마이크가 있을 작은 구멍 옆에서 빨간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하자 자리나는 자신의 목표가 있는 곳으로 녹음기를 향했다. 그리고는 녹음기에서 눈을 떼고는 흥분으로 커진 동공으로 위를 향했다.
위로 향한 그곳에서, 자리나의 갈색 눈동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얀 가면을 마주쳤다. 가면 안의 눈동자 역시 급격히 좁아지는 동공을 비춰내고 있었다. 아직 따뜻한 피가 묻은 가죽 장갑이 다가와 자리나의 콧등을 건드렸다
“벌써 인터뷰 시간인가?”
빌의 피는 자리나의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콧등에서 콧방울을 지나 입가에 이르자 자리나는 손바닥으로 황급히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앞에서 숨 쉬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자리나는 움직였다.
공포가 터져 나올 것을 기대했던 고스트 페이스는 자리나가 뒤를 돌자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자리나는 그의 손을 녹음기를 쥔 손으로 쳐내고는 이층집을 향해 도망치려 했다. 고스트 페이스는 자신을 등진 채 멀어지려는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고 그가 예상했던 붉은 핏방울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리나는 강한 통증에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이다, 자세를 잡고 다시 달렸다. 목에서 입으로 소용돌이치는 비릿한 피가 올라왔지만 자리나는 이를 악문 채, 계속 달렸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짐승 또는 그 무엇인가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고, 아까까지만 해도 들리지 않던 그의 심장 박동도 점차 커져 오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기를. 자리나는 주머니 속 열쇠를 움켜쥐며 생각했다. 뛰지 못하게 되어도 좋다. 숨만 붙어있다면.
***
자리나는 숨을 몰아쉬며 이층집으로 들어섰다. 고고하게 서 있던 집은 흰색의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지고, 벽을 이루던 판자가 튀어나온 채 안개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나에게는 그런 위를 올려다볼 여유가 없었다. 넓지 않은 집의 바닥을 눈으로 훑었을 때 자리나가 기대하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허리를 움켜쥐고 군데군데 쌓여있는 상자들 뒤를 살펴보던 자리나의 눈에 바닥에 위치한 금속 재질의 작은 문이 들어왔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려던 그때, 자리나의 뒤에서 검은 손이 나와 그의 눈과 열쇠를 움켜쥐던 손을 감쌌다. 자리나는 그 손들을 뜯어내려 저항했지만, 허리에 위치한 손에 딱딱한 금속이 만져지자 몸부림을 멈췄다. 어느새 피가 닦여진 칼날은 자리나의 허리춤에서 검은 가죽 장갑 사이로 자리나의 눈을 향해 푸른 달빛을 비춰 내고 있었다. 자리나는 그것이 언제든 위로 향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을 깨닫고는 작게 몸을 떨었다. 떨림을 느낀 고스트 페이스는 자리나의 머리에 플라스틱 가면을 기대며 그 안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도망치려던 게 아니라, 저걸 찾고 있었어?”
“…”
자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스트 페이스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자리나의 왼쪽 배에 칼을 꽂고는 오른쪽으로 선을 그었다. 자리나는 배를 찢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고스트 페이스에게는 그 비명도 불필요한 대답이었다.
“또 다른 대답을 하시네, 감독님.”
자리나를 감싸던 손을 놓자 그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의 몸이 바닥과 부딪히면서 칼이 신경을 건드렸는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열쇠가 손을 벗어났다. 자리나는 통증에 휩싸여 엎드린 채,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힘겹게 움직이며 자신의 뒤를 노려보았다. 고스트 페이스는 그 시선에 여전히 공포가 아닌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리나는 녹음기를 쥔 손이 머리맡,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는 차가운 금속에 닿자 희망이 눈앞에 있음에도 잡지 못한 채 무력함에 치를 떨어야 하는 자신을 동정했다.
“ㄴ… 가…”
자리나는 입을 열려 했지만, 그의 목은 고통에 잠겨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고스트 페이스는 자리나의 목소리를 잘 듣겠다는 듯, 그의 위로 몸을 숙였다. 그의 그림자가 자신의 위로 드리우는 걸 보며 자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눈앞이 흐려지는 게 그의 그림자 때문일까, 아니면 내 피도 가져가고자 몰려드는 안개 때문일까. 자리나는 피와 섞인 침을 바닥에 흘려보내며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응.”
“여기서… 나가기만 한다면.”
한 단어 한 단어를 말할 때마다 갈라진 배에 그것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고통이 강해질수록 자리나는 그것에 둔감해지고 있었다. 내 숨을 가져가고 싶다면, 내 분노와 집념도 가져가야 할 것이다.
“네 잘난 살인과 비밀들은 시궁창에서나 들을 수 있을 거야.”
시궁창이라. 고스트 페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습하고, 냄새나고 어두운 곳. 자리나와 그가 기억하고 있는 밖에서 일컫는 시궁창이 딱 이런 곳이 아니었던가.
“이곳이 이미 시궁창이야. 혹시 이곳에서 내 전시회라도 할 생각이야? 아니지. 훌륭하신 감독님이시니 상영회라도 열 계획이신가? 여기 흰 벽을 화면 삼아…”
“대니 존슨.”
그의 이름. 자리나는 흐릿해지는 시야로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미세하게 꿈틀거린 그의 왼쪽 어깨를 놓치지 않았다. 대니는 조용히 입을 다물더니 서서히 허리를 펴며 자리나의 시야 뒤로 사라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자리나는 실소했다. 왜 그러지. 잘나신 네 이름이잖아?
“착하고, 예의 바르고, 열정적이었던 기자.”
“내 기사라도 읽었나 봐?”
“말솜씨가 좋았던 사람.”
“지금도 그렇긴 해.”
“주목 하나 받은 적 없는 기자.”
“…”
대니의 대꾸가 들려오지 않자, 자리나는 더 이상 아무런 감각도 없는 배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자신이 열거하는 글들은 그의 말대로 기사글에서 읽었던 글이었다. 이곳에 떨어져 그를 마주했을 때, 자신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던 문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자리나가 바라본 그의 진짜 모습이었다. 대니가 자신의 관중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시선이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마주한 그의 모습은 그의 입맛에 맞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자리나는 자신이 이어갈 말들에 분노할 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희열감을 느꼈다.
“궁금한 게 있어. 네 살인보다, 취직에 성공한 네 가짜 이력서가 더 주목받았던 것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본인의 살인을 본인이 기고하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던 거야?”
밖에서의 그를 조롱하며 자리나는 자신의 입으로 나오는 말들에 자신도 빠져들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했던 안개들도, 감각을 찢어놓았던 통증들도 점점 머릿속에서 잊혀지려 할 때, 자리나의 허리에 강한 통증이 닥쳐와 자리나는 다시 새된 비명을 질렀다.
대니는 긴 가죽들을 펄럭이며 그의 위로 몸을 실었다. 생존자들의 죽기 전 발악을 보는 것은 그의 유흥거리 중 하나였으나, 자리나의 발악은 자신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에게서 주도권을 뺏어오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장난감이 장난감이 아니라면? 대니는 지금도 자신과 자신의 발밑에서 입을 놀리는 그를 안개를 통해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욕을 중얼거렸다. 하필 이런 놈을 던져놨어. 대니는 유흥을 포기하기로 했다. 주도권을 뺏기고 불쾌한 기분이 들기 전에, 자리나를 죽이고 다른 놈들을 노리는 게 더 재밌을 것 같다고 그의 머리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리나의 입을 막기 위해 칼을 위로 치켜들었을 때, 그의 가면 속 눈으로 무언가를 쥐고 있는 자리나의 손이 들어왔다.
“…하!”
기가 찬다는 웃음을 뱉으며 대니는 자리나의 손등에 칼을 꽂았다. 자리나의 손은 통증에 놀라 뛰며 쥐고 있던 녹음기를 토해냈다. 대니는 신음하는 자리나의 머리를 짚고 손을 뻗어 그 녹음기를 주워들었다.
“가해자의 이야기보다는 피해자의 이야기가 더 자극적일 텐데.”
대니의 목소리에 자리나는 피로 번쩍이는 왼손을 꿈틀거렸다. 대니는 반격 거리를 찾았고, 자리나에게 그것은 바라던 상황이 아니었다.
“감독이시면서 이렇게 방향을 못 잡아서야 되나. 이 녹음기는 쓸모없을 걸?”
“…네 보여줄 일 없는 사진들보다야. 훨씬… 쓸모 있을 걸…”
“하여간 한마디도 조용하질 않아.”
대니는 부서진 벽 틈으로 내려오는 달빛에 녹음기를 비춰보았다. 검은 금속은 자신의 주인에게로 달빛의 푸르스름한 빛을 흘려 내려보내고 있었다. 녹음 중이라며 깜박이는 붉은 조명과 자신의 심장이 같이 뛰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대니는 자리나의 녹음기를 자신의 가슴 속 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자리나는 그의 밑에서 피가 섞인 기침을 두어 번 내뱉었다. 대니는 그런 자리나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다가, 그의 머리를 잡아 올렸다. 자리나는 사정없이 당겨지는 머리카락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자리나의 한쪽 얼굴은 피로 뒤덮여 있었고, 다른 쪽은 아까 자신의 녹음기와 같이 달빛을 맞고 있었다. 대니는 그런 자리나의 옆얼굴을 보며 자신의 가면을 조금 들어 올렸다. 얇은 플라스틱이 가죽 후드 사이로 밀려 들어가며 그의 하관이 드러났다. 여전히 그림자 속에 머무는 그의 입가에는 자리나의 턱 끝에서 떨어지고 있는 핏방울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미소가 머무르고 있었다. 주도권은 다시 대니에게로 돌아왔다. 대니는 자리나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하며 입을 열었다.
“너는 이곳에서 칼과 도끼와 덫에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리다, 존재조차 사라지게 될 거야.”
자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지만 대니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침묵과 자신의 힘으로 당겨진 머리에서 전해지는 진동이 그를 만족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나라도 너를 기억해 줄게.”
대니는 칼을 쥔 손으로 자리나의 턱을 기울여 입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자리나는 몸부림을 치기에는 자신의 상태가 여의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움직였다. 잠깐의 정적 후, 대니는 입술에 통증을 느끼고는 황급히 입을 뗐다. 자신의 찢어진 입술로 처음으로 맡아보는 본인의 피가 새어 나왔다.
“… 아야.”
대니는 자신의 입술을 두어 번 부딪혀 보다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자리나를 눈치채고는 미소를 지웠다. 자리나의 눈빛은 ‘피를 흘려보니 어떻냐.’ 라고 말하고 있었고, 대니 역시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대니는 짜증을 섞어 칼을 옆으로 내동댕이치고는 품속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자리나는 곁눈질로 하얀 카메라를 시선에 담았다. 그의 카메라가 말하는 것은 한가지 뿐이다. 이곳에서의 끝이 다가왔구나.
죽음은 탈출구가 아니다.
이 저주받을 땅에 처음 끌려왔을 때부터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던 문장이었다. 어디서 들었던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자리나는 죽음으로서 편해질 것을 기대했으나, 그의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이 한 문장에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날숨을 뱉었다.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는 자리나는 몸에서 힘을 뺐다.
고스트 페이스는 희생자의 힘줄이 있는 오른쪽 어깨, 폐가 있는 옆구리, 마무리로 등의 척추를 찌르고는 카메라를 꺼낸다. 하얀 디지털카메라에 플래시를 설정하고는 자신과 생존자의 마지막 모습을 빛과 함께 기록한다.
그의 일련의 방식을 기다리며 자리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어깨를 가르며 침입하는 칼 대신, 얼굴에 닿는 차가운 바닥에 감촉에 자리나는 다시 눈을 떴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자리나는 눈을 굴리며 대니의 모습을 찾았다. 그런 자리나의 머리 위에서 녹슨 금속들이 부딪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새 자신의 위에서 일어난 대니가 빌의 열쇠를 주워들어 자리나가 손을 뻗고 있던 금속의 작은 문을 열고 있었다.
“…지금 뭘…”
자리나는 팔로 몸을 지탱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니는 문을 열어 자리나가 기어가기 쉽게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미쳤어?”
경악과 혼돈이 담긴 한마디에 대니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그의 뒤로 아까와는 다른 짙은 안개가 땅을 가르고 자신들의 주인인 그녀의 금빛 피부를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자리나는 땅의 떨림으로 그녀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자리나는 대니를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웃음을 멈춘 채 자신을 배웅하듯 손을 흔드는 그를 보며 자리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질문보다는 그녀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리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은 연기 속으로 몸을 끌었고, 연기는 그의 몸을 삼키며 문을 닫았다.
***
자리나가 사라진 뒤, 대니는 가면을 벗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가면, 카메라, 칼집. 대니는 가지고 있던 것들을 차례로 꺼내어 던지다가, 여전히 붉은 박동을 유지하던 녹음기가 나오자 손을 멈추었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녹음을 멈췄다.
붉은빛이 꺼졌다.
그리고 대니는 다른 버튼을 잠깐 누르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서는 탐욕스러운 그녀가 달려들어 그의 소지품과 바닥에 남아있던 자리나의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대니는 그녀의 안개를 경멸을 담아 바라보다, 녹음기에서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버튼이 다시 올라오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까의 버튼 옆, 재생 버튼을 누르자 녹음기 아래에 위치한 작은 스피커를 통해 한 노래 흘러나왔다. 자리나가 미처 지우지 못했거나, 그가 좋아했던 노래일 것이다.
사색에 잠겨있는 대니의 발밑에서, 안개는 자신의 주인이 만족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한가지가 부족했다. 안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의 배고픔은 이제 건물 전체를 울리고 있었고, 안개는 발치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대니는 작은 플라스틱 구멍을 통해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붉은빛을 띠는 안개에 몸을 맡겼다. 대니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감각들이 잠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각은 마지막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다.
If I break your heart,
Can you feel love anymore?
Do you feel love anymore?
후기&설명
빌루님:
-설명
자리나에게 개구 문을 따고 바라보는, 그런 대니에게 신경질적으로 미쳤냐고 물어보는 장면.
-후기
페어제 합작은 처음이었는데, 페어 분의 좋은 글을 보고 작품을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