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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으로

그림 : 레드클로뎃님(@REDC58299069)

​글 : 도둑님(@opop00012ttod)

 

 

 

 

 

 가냘픈 숨결이 목을 타고 올라온다.

 

 천천히 감겨오는 손은 조금씩 그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조임의 강도가 세질수록 눈앞이 흐려졌지만 그는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저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그것의 낯짝을 들춰보고 싶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한때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괴물한테 마음이 가는 것은 어째서였을까. 평생 그것을 이해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것을 향한 알 수 없는 호기심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또다시 의식이 사라지기 전에, 남은 힘으로 그것을 감싼 가면을 잡아당긴다.

 

 

 

 

 

 

 

 

 

 

¹.

 캠프파이어에서 눈을 떴을 때 들었던 기묘함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맑은 느낌이 든다. 순간, 퍼뜩하고 떠오른 이전의 기억들은 단편적이나 생생하면서도 낯선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 긴 시간을 어둠 속에서 헤맸다. 공포와 무력으로 인한 상실감은 그를 한 가지 본능에만 집착하게 만들었다. 피로 새겨진 기억 속 그는 인간성을 잃어가면서도 순수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책감보다 자긍심을 크게 가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걸 정녕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그 크나큰 괴리감에 속이 울렁거린다. 부정할 수밖에 없는 기억들이다. 지금의 자신은 기억 속의 그와 달랐다. 아니, 다르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그에 비해 자신은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옳고 그름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좋다 나쁘다의 느낌은 알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전의 삶이라 생각되는 그것은 정말 자신의 기억인 걸까? 만감이 교차한다.

 

 

 답답함에 머리를 감싸매고 있을 때, 맞은편에 있던 여자가 걸어와 슬며시 자신의 옆에 앉았다. 샐리라 불리는 여자는 왜소한 체격에 비해 거친 숨소리를 내는 것이 인상에 남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이, 말없이 자신의 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눈을 맞추었다. 괜찮아요? 그가 걱정스레 묻는 말에 순간적으로 눈이 흔들린다.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그는 다시 한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많이 불안한 거 같은데,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입을 다문 샐리는 덤덤하게 머리를 넘기면서도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그의 붉은 머리가 옆에 있는 모닥불을 따라 일렁인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격양된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몸에서 베어나는 따스함이 그의 심장을 잔잔하게 만든다. 이 여자는 위험하지 않다. 진정된 분위기에 샐리는 그를 올려다보곤 살짝 미소 짓는다. 그의 물음에 답해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을 벌리면 아, 으,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무거운 신음만 뱉어질 뿐이었다. 홀로 지낼 때엔 주변에 그와 같은 사람이 없다 보니 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오히려 인사도 하지 못하는 이런 자신이 한심했다.

 

 샐리는 말을 하지 못하는 그를 지켜보다 무언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들었다. 옷 사이로 손수건 하나가 흘러나왔다. 꽃무늬가 그려진 손수건은 비록 오래됐지만 사람의 손을 덜 탔는지 비교적 깔끔했다. 그리운 냄새가 났다. 그는 땅에 떨어진 수건을 손으로 털어내면서 유심히 살펴보다 거기에 그려진 자수를 발견하고는 고개 들어 입을 열었다.

 

 

 

 안나,

 예쁜 이름이네.

 

 

 

 

 

 

 

 

 

 

².

 짙은 안개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울창한 숲속,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밟으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안나의 시선은 자꾸만 아래로 향했다. 내려다본 자신의 몸, 굳세고 다부진 팔과 다리에 새겨진 크고 작은 생채기들은 험난했던 오지 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깊은 북부의 숲, 새하얀 눈 위로 힘없이 쓰러져간 그의 어머니. 공포로 마비된 안나는 엘크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어머니의 자장가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주저앉아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발은 괜찮니?

 캠프파이어에서의 안나는 맨발로 땅 위에 서있었다.

 

 

 건장한 외모와는 달리 행동 하나하나에서 드러나는 어리숙함이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 것일까. 그로선 거기까진 알 길이 없었지만 안나에 대해서 동정이 갔다. 샐리는 착잡해 하면서도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을 아는지 자신의 하얀 치마를 찢어 안나의 앞에 주저앉아 그의 발을 집어 들었다. 처음부터 신발 없이 돌아다녔던 걸까, 상처로 부르튼 발이 샐리의 눈을 살짝 찌푸리게 만든다. 발이 천으로 감싸질 때마다 안나는 간지러웠는지, 한시라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아이처럼 발가락을 조금씩 꼼지락거렸다. 샐리는 그런 안나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얌전히 있으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내 것을 신겨주기엔 너의 발에는 작을 거 같고, 저들에게 벗어달라기엔 부탁을 들어줄지는 모르겠구나.

 

 

 

 

 

 안나는 자신의 발을 물끄러미 보다가 샐리의 목소리에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샐리는 여전히 걱정되는 듯, 조심스레 안나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안나를 관찰하면서 한편으론, 마음이 다른 데로 쏠렸는지 안나가 말을 걸어도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떨궈진 고개를 따라 헝클어진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안나는 손을 들어 장난치듯이 그의 머리카락을 꼬아 본다. 그의 손짓에 샐리는 그제서야 두 눈을 깜빡이며 안나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가 이렇게까지 정신없어 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안나는 그런 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³.

 사랑하던 이의 직장 동료가 찾아왔던 그날, 그는 모든 걸 잃었지만 자신만큼은 잃지 않으려 했다. 삶이 그를 무너뜨리려 할 때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악착같이 버텨왔다.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으려 했다.

 

 

 

 

 

 

 

 크로투스 프렌 정신병원, 샐리는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거기에 적힌 글을 은연중에 중얼거렸다. 화재의 잔해로 뒤덮인 폐병동은 매캐한 공기와 함께 악취가 진동했다. 그중에는 익숙한 약품 냄새도 섞여있었다. 이곳은 언제 봐도 불쾌하다. 바람소리를 따라 들리지 않는 비명이 울려 퍼진다. 매 저녁, 어둠이 지고 창밖으로 달빛이 드리울 때면 복도가 환자들의 절규로 가득 채워졌다. 그 소음에 익숙해져가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행복한 꿈을 꾸었다.

 자신의 반려와 그가 지은 오두막에서 함께 행복하게 사는 꿈을. 그와 집 앞에 작은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갓 태어난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그런 소소한 평화를 그렸었다. 이루지 못할 꿈이었다.

 

 

 

 피곤하다. 어수선한 정적에 잠식되어갈 때, 묵직한 발소리가 그를 감싼 정적을 깨부쉈다. 뒤돌아본 문 앞에는 안나가 서있었다. 발에 박힌 유리를 중심으로 천이 붉게 물들어갔다. 작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가 아둔해 보인다. 샐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의 힘없는 걸음으로 안나에게 다가갔다. 안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기억날듯했지만 떠올리려 할수록 숨이 막히고, 가슴이 조여왔다. 떠올렸다간 자신 또한, 기억 속의 그와 같이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의 자신을 잃는 게 두려웠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거친 숨결이 크게 다가왔다. 그는 가느라단 손가락으로 안나의 발에 박힌 파편들을 조심스레 집어 떼어냈다.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잖니. 샐리의 한숨에도 안나는 천진한 얼굴을 보일 뿐이었다. 폐허 안을 계속 돌아다녔던 걸까. 숱하게 묻어나는 잔해의 먼지를 털어내다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샐리는 그의 투박한 손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들었다. 그가 소중하게 감싼 손안에서 나온 것은 나무로 조각된 말이었다. 샐리는 그 물건을 기억한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의무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들과 의미 없는 유대감을 쌓아올렸다. 이 나무 말을 포함한 병원에 남겨진 흔적들은 지금의 자신에겐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이자가 자신이 내다 버린 흔적을 원했기에, 버릴 수가 없었다.

 

 나무 말을 쥔 손이 샐리의 손길을 따라 움찔거린다. 조잡한 말 인형을 손에서 떼어내려고 하면 그는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더욱 힘을 주며 손을 꼬옥 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살며시 그를 잡던 손을 내려놓는다.

 

 

 마음에 드니?

 

 

 샐리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안나는 고개를 두세 번 크게 끄덕였다. 좋은 건 좋을 대로, 고집은 고집대로, 그는 자기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정말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내심 그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럼 잃어버리지 않게 잘 간직하고 있으렴.

 

 

 

 

 

 

 

 

 

 

⁴.

 안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니?

 

 

 코끝을 찌르는 탄내에 고개를 들어 올린다. 천장이 있어야 할 곳엔 잿빛 하늘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며 공허함에 빠져들 때 그의 한마디가 귀에 들어왔다. 샐리는 바닥에 쌓인 먼지를 따라 발끝으로 선을 그리며 안나를 한번 쳐다보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여기보다 더 먼 곳을 향한 그의 눈이 흐리게 보인다.

 

 원래 있었던 장소로 말이야. 메마른 입 사이로 숨결이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눈을 뜨면 평소와 같은 배경이 보일 줄 알았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낯선 장소에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불안감은 캠프파이어에 있던 모두가 똑같이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거 같아서, 그래서 걱정되니까 그런 말을 꺼낸 거겠지.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나는 가능하다면 돌아가고 싶단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했던 날들로. 너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지 않았니?

그의 말에는 후회가 남아있었다.

 

 

 

 

 

 매번 샐리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안나에게 끝없이 말을 걸었다. 자신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그가 위로를 원하는지, 아니면 그저 소리를 채우려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기운 없는 모습을 보였다. 계속 과거를 되새기며 잊혀진 슬픔에 아파하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진정되지 않는 그 모습이 마치 딴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과거라면 떠올리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잊지 않으려 했다. 안나는 그런 그가 신경 쓰이면서도 궁금했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지, 그가 잊지 않고 가져가려는 과거는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사람의 기억을 엿보고 싶다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그에게 질문을 할 수도, 실없는 소리를 뱉을 수도 없었다.

 

 

 

 

 

 

 

 

 

 

⁵.

 캠프파이어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에 대한 감각이 점차 뒤틀리기 시작한다. 이상하다고 여겼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숲을 따라 이 장소에 발들 들인 이후로 다른 곳으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갈 곳이 없던 그들은 병원에 남아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안나 또한 그랬다.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나 돌아다녔지만 졸음도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안나의 정신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그의 옆에 있던 샐리는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오랫동안 당신을 따랐지만 저는 여전히 당신이 하려는 짓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는 누군가에게 불만을 토로하듯 중얼거렸다.

 

 

 

 샐리는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멀고도 가까운 시간, 그 악마가 새로운 인간을 안개 속으로 끌어들였다. 샐리는 그를 처음 본 순간 그가 자신들과 같은 동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샐리는 그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같은 일손이 늘어났다는 사실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서 거구의 사냥꾼이 걸어온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도끼에 묻은 피가 일정한 간격으로 땅에 뚝 하고 떨어졌다. 토끼 가면의 틈새로 그의 얼굴이 살짝 비쳤다. 그것을 가만히 서서 보고 있자니 그의 새카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곳에서 마주친 자들은 전부 하나같이 텅 빈 눈을 하고 있었다. 거기엔 빛 한줌 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시체를 보는듯했다.

 

 눈을 응시하면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내 또한 모두 똑같이 한결같았다. 그들이 원래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상관없었다. 그저 모두가 같은 과오를 가지고 절망에 허덕이다 결국엔 미쳤다는.. 뻔한 이야기다. 개중에는 처음부터 악의를 가지고 사람을 해치는 자도 있었지만 타인의 사정이 어찌 됐건 샐리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그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살인자였기에 오히려 동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현실로부터 도망쳤고, 인간으로 남길 포기했다. 깊게 생각할 것 없이 그 악마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편해질 일이었다.

 

 

 그래서 더 샐리는 지금 그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았다.

 

 

 어느샌가 날라온 손도끼가 그의 왼쪽 어깨에 박히며 쓰러졌다. 깊게 파인 상처 사이로 뜨거운 피가 흘러넘쳤다. 이전에 정신없이 병원 밖으로 나온 이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다. 올라오는 통증에 머리가 마비되어갈 때 사냥꾼이 샐리의 눈앞까지 걸어와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주친 그의 눈에는 정체 모를 분노와 공포가 도사렸다. 그리고 그가 겪고 있는 감정의 끝에는 샐리가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사냥꾼은 샐리의 몸 위에 올라앉아 단단히 박힌 도끼를 힘들이지 않고 그의 어깨에서 빼내었다. 익숙한 장면이다, 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오싹함을 느낀 샐리는 본능적으로 그의 다음 공격을 악마가 준 힘으로 막았다. 도끼를 쥔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그는 순간 움직이지 않는 손을 보며 놀란 듯이 입을 달싹이다 다시 굳게 다물고는 이를 갈았다. 지독한 살기가 차가운 공기를 타고 상처에 스며든다.

 

 

 

 

 

 

 

 

 

 

⁶.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일은 갑작스레 찾아오는 법이다. 과거에 얽매인 불행도, 현재에 스며든 불안도, 그리고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까지. 도망칠 수 없기에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바닥에 웅크려 앉아 그대로 무릎에 고개를 파묻는다. 그러고 있으면 잠이 들듯 눈앞이 캄캄해지고 감각이 둔해진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 때, 귀를 찌르는 소리에 가까스로 멀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를 따라 뛰쳐나간 복도에는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캠프파이어에 있었던 인간들 중 하나였다.

 

 

 안나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그는 매우 신경질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막 깨어난 안나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혀를 쯧, 차며 인상을 팍 구겼다. 도움 되는 놈이 하나도 없군. 안나는 그 말을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오히려 애써 노골적으로 보이려는 그 모습이 마치, 예전에 숲에서 봤던 약하고 야만스럽기만 한 군인들과 같아 보여서 잠깐 웃음이 터져 나오려던 걸 애써 참았던 기억이 났다.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나타난 그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의 사체를 봐도 별 감흥은 없었다.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자꾸만 거슬리는 게.. 뭔가를 놓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뭘 잊어버린 거지? 자신이 지나온 길을 따라 눈을 바쁘게 움직이다 이내 깨닫는다.

 

 

 

 아,

 샐리가 없다.

 

 

 그가 언제부터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잃기 전에 본 샐리는 어딘가 홀린 듯이 잔해더미를 헤집고 있었다. 파편에 손이 찔려가며 피를 흘려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앞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돌아왔을 땐 그가 앞에 앉아 있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손이 안나의 목을 감싸 쥐려다 멈춘다. 잠깐이나마 닿은 손결이, 안개 사이로 자신을 짓누르던 그것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연하고 서늘한 감촉을 안나는 기억하고 있다. 한번 드러난 기억은 더 이상 감추기란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얼굴엔 절망이 그늘졌다.

 

 

 

 

 

 

 

 

 

 

⁷.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숲은 어머니를 잃은 그날을 기점으로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그런 그가 살기 위해 도끼를 들었을 때는 무언가를 잃은 뒤였다. 유일한 지주는 사라졌지만 사냥꾼으로서의 삶은 그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생존을 위해 도끼를 휘두를수록 마음은 무뎌져갔지만 그만큼 두려울 게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전쟁은 끝났다. 숲에 발을 들였던 인간들은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진지 오래다. 멀어져 가는 폭발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안나는 아무도 없는 오두막에서 피로 점철된 가면을 벗어놓았다. 그리고 다시 새 가면으로 얼굴을 덮는다. 그는 전쟁통에서 자신의 아이에게 줄 새 장난감을 찾은 것에 몹시 신이 나있었다. 들뜬 그는 쉬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숲속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누군가의 속삭임을 따라 들어온 안개 속에서 그것과 마주했을 때,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날의 기억을 들쑤셨다.

 

 

 저 멀리서 새하얀 원피스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정체 모를 긴장감이 온몸을 휩싸고 돌았다. 낡은 천으로 얼굴을 감싼 그것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식은땀이 목을 타고 흐른다. 안나의 남다른 본능이 그것을 죽이고자 외쳤을 때, 공포는 격노가 되어 살의를 불러일으켰다. 깊게 생각할 틈 없이 눈앞의 적을 향해 손도끼를 든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안나를 덮쳤고, 그 뒤의 일은 순식간이었다. 무언가 생각을 하기도 전에 기억은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⁸.

 쇠톱에 묻은 피를 엄지와 검지로 잡아 비스듬히 닦는다. 그를 죽이려 달려든 사냥꾼은 자기가 역으로 당하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 혈안이었다. 샐리는 감당 안 되는 살의에 못 이겨 몸을 치고받다가 무심결에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는 그것을 보며 지금까지 자신이 죽여온 인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애써 그들을 기분을, 살해당하는 자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다. 이건 그날처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취했을 뿐인 행위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무도 없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땅 위에 널브러진 시체를 뒤로한 채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샐리는 불안감에 숨을 삼켰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샐리는 방금 일어났던 일들이 꿈이길 바랐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앞에 자신이 죽였던 사냥꾼이 나타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사지 멀쩡한 상태로 나타난 그는 전처럼 샐리를 죽이려 들었다. 그리고 샐리의 손에 죽어갔다. 서로 죽이기를 반복하는 일이 한두 번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기에 샐리는 지쳐있었다. 이쯤 되면 위에서 간섭할 법한데도,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귓가에서 그 악마의 웃음소리만이 맴돌 뿐이었다.

 

 그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룰을 중요시하는 듯싶으나 결국 결과가 어찌 됐던 자기 좋을 대로 넘겨버릴 뿐이었다. 대부분의 일 자체를 의미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한동안 안나와 샐리의 상태를 지켜보더니, 그들에게서 기억과 힘을 뺏은 채 캠프파이어로 던져버렸다. 이것 또한 변덕이 심한 그가 생각해낸 사소한 장난에 불과했다. 그 장난이란 것을 그들이 알 방도가 없었다.

 

 

 

 

 

 

 

 

 

 

 

 

 

 

 

 

 

 

 

 

 

⁹.

 안나는 창고 구석의 캐비닛에서 도끼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그대로 남자가 죽은 복도로 나와 바닥에 길게 이어진 핏자국을 따라 걷는다. 이 흔적을 쫓아가면 필히 죽여야만 하는 그것과 만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조각난 기억에 잡아먹힌 그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살인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망가져가는 자신을 알아채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에게서 가까워질수록 심장의 고동이 거세진다.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인다. 악마는 그에게 끝없는 거짓을, 계속해서 들려준다. 충동을 억누를 수 없다.

 

 

 

 핏자국이 끊겼다. 흔적이 사라졌다 해서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는 샐리가 아닌 자신이 여태 두려워했던 괴물이 하얀 원피스를 붉게 물들인 채로 서 있었다. 그것은 안나의 손에 들린 도끼를 한번 보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기억을 빼앗겨도 너는 여전히 그대로구나.

너도 결국엔 인간이 아닌, 나와 같은 괴물인 거야.

 

 샐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안나를 올려 보다가 이내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안나의 앞에 서서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다.

 말라 보였던 눈에 슬픔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후기

레드클로뎃님: 합작은 처음 참여해 보는데 페어분도 너무 금손이시고 해서 제출하는데 조금 떨렸습니다… 다들 너무 수고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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