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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랍스터님(@sonotgrownup)

​글 : 견고님(@___DogGo)

 성마른 포효가 묵은 피로 얼룩져 더러운 갈고리를 뒤흔들었다. 목에 핏대를 세운 여자가 수족이 묶인 채 피 웅덩이에 뺨이 짓이겨 나동그라져 있었다. 근육이 움직이는 족족 새끼 잃은 범처럼 날뛰는 통각에 눈동자가 경련했다. 피부처럼 걸치는 토끼 가면은 몸부림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곳은 거미줄 위다. 여자의 영역이 아니다. 영역 구분이 철저한 여자는 천적의 영토에 끌려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거미줄에 들어서며 쥐고 있던 도끼가 사라지는 찰나에, 능숙한 사냥꾼은 자신이 잡기 좋게 덫에 걸린 사냥감이라는 점도 알았다. 여자의 불화살 같은 시선이 꽂힌 곳은 거미의 아가리였다. 그곳에는 여자의 어머니 모습을 한 가짜 신이 있었다.

 육체적인 통증 따위가 안나의 머릿속을 재구성하지 못할 거라는 판단은 옳았다. 제 몸에서 피를 내는 일련의 행위에 이따금 신음하던 여자는 기억 속 어미가 죽어가는 모습이 실체화되자 끝없는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느꼈다. 감정을 먹는 악마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가짜 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여자가 맞닿은 땅에서 화려하게 뻗은 수사슴의 뿔 한 쌍이 솟아 여자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여자는 목을 막고 있던 것이 터져나오는 걸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끓어오르는 격통이 성대를 거쳐 찢어졌다. 전신을 휘감은 고통을 부르짖고 닿지 못함에 분개했다. 군데군데 꿰뚫린 상흔이 피 흘리며 벌어졌다. 언어가 되지 못한 공기의 파동은 가짜 신을 어떻게든 찢어발겨 저주와 함께 묻어버리겠다는 선전포고였다. 하지만 미지의 힘이 목을 죄는 탓에 성치 않은 몸을 일으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핏빛 고성이 잦아들 즈음 사슴 뿔은 재로 변해 흩어졌다.

 

 “안나. 새로운 방식으로 반항하는구나. 무슨 바람이 분 게니?”

 

 가짜 신이 그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엔티티. 안나는 그것의 이름을 기억했다. 안나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체벌은 익숙해지려던 참이라고 생각했다. 안나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엔티티는 안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안나는 어미를 흉내내는 엔티티를 용서할 수 없었다. 엔티티가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맥없이 웅크린 안나의 짧은 앞머리를 어루만졌다. 본래도 제멋대로인 억센 모발은 피와 땀으로 엉겨 붙어 빳빳해져 있었다. 안나의 몸이 일순 떨렸다. 자신을 내려보는 눈빛이 어머니의 사려와 닮아 있었다. 안나는 엔티티로부터 어머니를 보았다는 사실을 못 견뎌 이를 갈았다.

 

 “공기에 공포를 풀어 서서히 숨통을 죄고 희망을 앗아가는 게 네 특기가 아니던. 그렇지 않니?”

 

 안나는 눈을 마주치기는 커녕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며 제 앞에 피 섞인 침을 뱉는 게 다였다. 대화할 때 상대방이 아닌 다른 곳을 보는 건 예의가 아니잖니. 엔티티가 엄한 체 하는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읊조렸다. 까끌한 머리칼을 만지던 엔티티의 손이 안나의 턱을 당겨 올렸다. 짐승과 닮은 검은 두 창이 엔티티의 시선과 부딪혔다.

 

 “말을 해보렴. 언어를 이용하는 게 너희 인간들과 짐승의 차이점이건만.”

 

 안나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제 것 같지 않은 몸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송곳니 있는 것들은 어떻게 길들이는지 잘 안단다. 너 같은 사냥개가 한둘이 아닌 덕분에.”

 

 피를 많이 흘려 정신과 시야가 아득했다. 엔티티의 말이 웅웅대며 귓바퀴에 갇혀 반복됐다. 안나는 느슨해지는 눈꺼풀 근육을 느꼈다.

 

 “오늘은 이쯤 하마. 다음부터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 안나. 결과는 네가 잘 알고 있겠지.”

 

 엄마. 안나가 가느다랗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자 새된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안나, 이명 헌트리스는 수차례 희생제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녀가 그럴 기회를 저버렸다는 표현이 옳았다. 안나는 매번 절대 사라지지 않아 마지막인 적 없던 ‘마지막 가면’을 바쳐 붉은 숲에서 희생제를 벌였다. 그러나 생존자를 쓰러트리고 갈고리에 거는, 엔티티가 바라는 가장 단순한 일과를 수행하지 않았다. 생존자들이 살금살금 달리다 멀찍이서 눈을 마주쳐도 그들에게 도끼를 던지지 않았다. 안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젖혀 하늘만 바라보다가 해달별을 쏘아 떨어트릴 기세로 도끼를 던졌다. 하나, 둘, 열, 백, 이백. 어깨가 뻐근하도록 던져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희생제 내내 경고조로 속삭이는 안개의 말은 안나의 안중에도 없었다. 대신 안나는 끊임없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봄날에 가을의 별이 보여요. 우리의 나무집 지붕은 늘 북극성 아래 있는데, 북극성이 보이지 않아요. 작은곰자리라 사냥당한 걸까요?’ 어머니의 환영은 답하지 않았다.

 안나는 어떠한 뜻을 표명하거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 부러 엔티티의 심사를 뒤틀 정도로 무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불멸하는 강자와 척을 지는 건 아주 껄끄러웠다. 하지만 안나는 동시에 무섭도록 내면에 몰입하는 자였다. 우연히 발견한 의문이 싹을 틔우자 무수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안나는 자신의 방식으로 의문을 사냥하여 배를 헤집어 답을 찾으려 들었고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차가운 손길이 근육에 스며드는 감각에 안나가 깨어났다. 정신을 추스르자 익숙한 빗줄기가 자신을 푹 적시고 있었다. 바람이 젖은 저녁의 초목 냄새를 싣고 면전에 날아들었다. 피가 멎지 않은 상흔에 찬 빗물이 스며들자 오한이 들었다. 집이다. 이곳을 집이라 부르기에는 마뜩잖은 구석이 있었으나 달리 집이라 칭할 곳이 없어 그대로 부르기로 했다. 알맹이 없는 통나무 껍질이 쓰러져 있는 이곳은 곰이 할퀸 자국이 난자한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였다. 엔티티는 언제나 자신을 먹다 남은 사체 취급하며 이곳에 내동댕이쳤다. 안나는 감각 없는 몸에 힘을 싣고 일어나 쓰러진 통나무에 익숙하게 손을 넣어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 안에는 빻은 약초가 소량 들어 있었다. 채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바닥을 보이지. 안나는 유리병의 매끈한 표면을 손바닥의 볼록한 살로 문지르다 금세 관뒀다. 그러고는 토끼 가면을 챙겨 들고 비를 막아줄 너른 노목 한 그루를 찾아 앉았다.

 아무리 엔티티가 안나의 몸을 할퀴었다 해도, 그녀는 숲이 제 것이 아니었던 시절에도 홀로 환란을 헤쳐나간 영혼의 소유자였다. 으레 그러했듯 상처는 곧 통증이 식고 가슴 속 무덤에 묻히리라. 안나는 엔티티가 찢어발긴 살결 위로 빻은 약초를 깔고 붕대를 감았다. 약초가 방아쇠라도 되는 양, 환부를 중심으로 따가운 통증이 번지기 시작했다. 고통이 신체를 좀먹자 내면의 평화에 금이 가며 어머니의 환영이 찾아와 무어라 속살거렸다. 빗소리와 어머니의 음성이 뒤엉켜 불유쾌한 소음이 되었다. 그것이 증폭되며 몸 안에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느낌에 안나는 손등으로 귀를 억세게 문질렀다. 끊임없이 가해지는 압력 탓에 안나의 귀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통증이 잦아들며 귀에 오른 열이 빗방울을 족족 데울 때, 기류가 뒤틀리며 일순간 비가 하늘로 치솟았다. 바람이 웅웅대며 긴 울음소리를 냈다. 바람은 공기의 호흡이다. 누가 숲의 숨통을 쥐었는가. ㅡ침입자인가? 희생제가 치러지고 있지 않을 때 붉은 숲에 발을 들이는 인간이 종종 있었다. 노련한 사냥꾼은 제 피로 뒤덮인 사지를 일으켜 세워 손도끼를 움켜쥐었다. 안나는 신중하게 밤바람을 읽으며 바람이 어긋난 곳을 가늠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손도끼가 빗방울과 어둠이 깃든 나무 틈을 스쳐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휙. 빗 새로 터져나올 비명소리나, 타격음을 예상한 안나는 빗소리에 쓸려가는 정적에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 무뎌졌을 리는 없다. 안나가 저도 모르게 큰 도끼를 집어 들고 몇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밤의 장막과 숲 그늘 사이에서 창백한 인영이 나타났다. 베갯잇을 뒤집어 쓴 그것은 자신보다 머리가 높았다. 가까워지는 거리와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는 어깨가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시체 같이 늘어진 발은 허공에 떠있었다. 맥없이 늘어진 팔 끝에는 뼈톱 대신 손도끼를 쥔 손이 비바람에 느릿이 흔들렸다. 어딜 보나 유약하기 그지없는 여자였다.

 너스는 허공에서 내려와 안나와 시선을 맞췄다. 두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안나는 그렇게 느꼈다.

 

 “듣던 대로 솜씨가 좋더구나, 안나. 정확히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어.”

 

 금방이라도 질식할듯 억눌린 호흡이 언어로 빚어졌다. 너스는 비어있는 손으로 미미하게 찢긴 베갯잇을 매만져 보였다. 안나의 작품이었다. 너스는 손을 펼쳐 손도끼를 푹신한 풀숲에 떨궜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곁에 가도 되겠니?”

 

 불청객의 미지근한 음조에 어눌했던 감각이 완전히 깨어났다. 안나는 사냥감을 감정하는 눈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사냥꾼의 숲을 이렇게나 깊숙이 둘러본 살인마는 없었다. 희생제로 사용되는 붉은 숲은 영토의 작은 일부였다. 누구라도 붉은 숲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헌트리스는 더럽고 큰 발이 자신의 초목을 헤집는 짓을 끔찍이 싫어해 침입자의 팔다리 하나쯤은 못쓰게 해야 성이 풀렸다. 제압 면으로 살인마는 생존자보다 까다로웠다. 저렇게 작다면 또 모를까.

 너스는 자신을 꿰뚫는 시선을 거부하지 않고 잠자코 답을 기다렸다. 안나는 고개를 좁게 내저으며 큰 도끼를 고쳐 잡았다.

 

 “여기는 내 숲이야. 네가 왜 내 숲에 있지?”

 

 쉰 음성이 갈라져 나왔다. 안나는 ‘내 숲’이라는 말을 재차 강조했다. 영역을 침범한 자를 향한 경고였다.

본래대로라면 안나는 질문 같은 알량한 자비조차 베풀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고작 팔목이 도낏자루만 하고 발도 작은 여자였다. 안나는 너스에 관해 아는 바가 적었다. 너스가 아무리 무자비한 살인마라 한들 그것은 생존자 입장에서 구전된 신화일 터였다. 자신의 역할을 따지자면 호랑이와 토끼 중에서 호랑이였다. 저 여자는 호랑이 중에서도 한 입 거리 작은 호랑이고. 그러니 벌써부터 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저주인지 축복인지, 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단다. 네가 날 필요로 해서 와보았지.”

 

 “내가, 너를? 그런 적 없어. 한두 번 다친 거 아니야.”

 

 안나가 날카롭게 즉답했다. 너스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천천히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누구나 고통을 덜 약이 필요한 법이야. 그게 남의 피를 옷처럼 입는 살인마라 해도.”

 

 안나는 불청객에게 소리치려 목청에 힘을 주었다가 복부에 내리꽂히는 번개 같은 통증에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허리를 더듬자 새빨간 선혈이 묻어났다. 그간 흘린 피로 현기증이 몰려와 안나는 고개를 털었다. 안나가 큰 도끼를 놓치고 잠시간 주춤대는 사이 너스는 안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너스는 안나의 손목을 잡아 노목 아래로 이끌었다. 안나는 저항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자가 안나의 상상보다 강한 손아귀의 소유자인지, 자신이 약해진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안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너스를 바라보았다.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적어도 당장 해칠 의사가 없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차렸다. 너스는 점멸 몇 번으로 화한 냄새가 나는 상자를 가져와 안나 앞에 앉았다. 곱슬머리를 한 생존자가 이것을 구급상자, 라고 불렀다. 안나는 미간을 구겼다. 이런 물건은 겁쟁이 토끼들이나 쓰는 거잖아.

 너스는 안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며 희다 못해 잿빛 기운이 감도는 손가락을 접어 안나의 스웨터를 걷어 올렸다. 차가운 손끝이 사냥꾼의 살가죽에 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생경한 감촉이 뒷목에 소름을 돋궜다. 너스는 안나의 귓전에 고개를 수그려 읊조렸다. 귀가 붉구나. 상처는 없는데, 어디 부딪히기라도 했니. 건조한 음색에 거짓인지 진심인지 모를 근심이 깃들었다. 안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스의 처치로 통증이 더해지자 손가락을 오그라트려 핏줄이 돋도록 주먹을 쥐었다. 그뿐이었다. 간간히 흠칫대는 몸짓 외는 그 어떤 소리도 몸부림도 없었다. 그 대신 안나는 너스의 옷깃에 가려진 목을 노려봤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움켜쥐는 건 물론이고 뭉툭한 이빨이라도 댈 셈이었다. 상처 입은 짐승은 평소보다 몸집을 부풀리고 발톱을 상시 빼 들었으며 예민하게 굴었다. 지금의 안나가 그러했다.

 

 “이것부터 먹어보겠니? 통증을 가라앉힐 거야. 열매가 약초의 쓴맛을 없애줄 거란다.”

 

 마무리로 붕대를 맨 너스가 어느샌가 녹갈빛 약초 위에 윤기가 도는 오동통한 붉은 열매를 얹어 안나에게 내밀었다. 나도 붕대쯤은 두를 줄 아는데. 안나는 복부에 감긴 낯선 붕대에 손을 얹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안나의 조용한 거부 의사에 싱거운 호응이 끝이었다. 너스는 여분의 붕대 위에 약초와 붉은 열매를 두었다. 확실히 붕대를 감고 나니 한결 나았다. 너스가 간호사라는 뜻이었지. 고통이 줄자 피로가 밀려왔다. 살인마란 족속은 육체적인 휴식을 취할 연유가 없었으나 안나는 눈을 감고 쉬고 싶었다.

 

 “이제 가. 내 숲에서 나가.”

 

 안나는 기어이 불청객을 쫓아내야 만족했다. 너스는 안나를 가만히 응시하다 몸이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럼. 좋은 꿈 꾸렴, 안나.”

 

 너스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숲의 저편에서 여자가 몸이 산산조각났다가 붙으며 지르는 비명이 들려왔다. 이 약초가 정말 통증을 없애준다면 자신이 챙겨야 하는 게 아니었나. 안나는 너스가 점멸한 자리에서 비상하는 검은 재를 바라보았다. 손이 눈처럼 차가운 여자는 기이하게도 불꽃을 닮았다. 안나는 자신의 물건을 챙겨 북극성과 반대편인 어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안나가 떠난 자리에 약초와 붉은 열매가 남았다.

 

-

 

 다음날 안나는 아침 이슬을 헤치고 달음질하며 회복한 몸을 체감했다. 안나는 멧돼지와 거리를 좁히며 불현듯 오래 전 만났던 어린 호랑이를 떠올렸다. 미숙한 시절 그녀는 사소한 실수로 빈틈을 보여 갓 성체가 된 호랑이에게 죽임당할 뻔한 적 있다. 기척을 죽인 호랑이는 안나가 알아챌 틈 없이 달려들어 살과 근육을 찢었다. 하지만 이빨이 목을 파고들기 전, 두개골을 향한 일격으로 끝났다. 짧은 전투 후에는 덜렁거리는 가죽 새로 검붉은 피가 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휘청대는 다리가 부상의 심도를 알렸다. 물렸더라면 아무리 어린 호랑이라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테다. 강한 정신력이 안나를 지탱해 집으로 이끌었기에 흰 눈밭이 무덤이 되는 일은 없었다. 상처를 씻어낸 뒤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말아 꼬박 며칠을 앓은 후에야 침대서 일어났다. 엔티티가 남긴 상처는 호랑이의 발톱과 비슷했다. 그런데 고작 하루만에 육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 살인마는 비인간적인 능력을 부여받았다. 안나는 그 차이점이 마주할 때마다 기억 속 익숙함이 망가져 불쾌했다. 그러나 눈앞의 멧돼지가 단단한 발굽으로 진흙을 튀기며 질주하고 있었으므로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안나는 뺨에 묻은 멧돼지의 피를 닦았다. 빗줄기가 흘렀다면 핏물마저 쓸어갔을 터인데 드물게 비 내리지 않는 귀한 날이었다. 안나는 신중하며 지혜로운 사냥꾼이었다. 희생제에서 본분을 마다하고 답을 사냥할 요령은 당분간 접어두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걸 알았다. 멧돼지의 상아로 화환을 엮어 꺼지지 않는 불꽃에 던지면 날뛰는 심기가 미미하게나마 누그러지리라. 안나가 멧돼지 시체에서 쓸만한 부위만 걸러내는 작업을 마무리 짓고 일어설 즈음, 저 멀리 희끗한 실루엣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은 암녹색과 싱그러운 녹음 사이에 숨어 머리와 목, 등 일부만 내놓고 풀을 씹고 있었는데, 작은 머리와 둥그런 호선을 이루는 몸선으로 보아 사슴인 것 같았다. 안나는 당장이고 달려갈 듯이 발꿈치를 움찔였다. 낯섦을 포박하여 실체를 해부하고픈 욕구는 외면하기 어려웠다. 유감스럽게도 품에 들린 게 많았기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안나는 눈길을 돌릴 줄 몰랐다. 날카로운 시선을 의식한 흰 짐승이 고개를 쳐들고 한쪽 귀를 팔락였다. 안나와 흰 짐승은 누구 하나 먼저 돌아설 때까지 눈빛을 나눴다. 먼저 돌아선 쪽은 흰 짐승이었다. 짐승은 등을 돌려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고 이윽고 안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동이 아우성치고 피가 빠르게 돌았다. 흥미로운 사냥감을 볼 적이면 온몸이 들끓는다. 안나는 미약한 흥분을 안은 채로 어머니의 집으로 서둘러 걸었다. 저것이 자신의 숲에서 난 이상 한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 안나는 집에 다다르기 전까지 그 새하얀 실루엣을 그리며 흰 머리를 집안 어디에 장식할지 궁리했다.

 안나는 집에 도착하는 즉시 짐을 털어내고 도끼자루에 핏빛 도끼날을 조립했다. 그 옆에 더러운 도끼날이나 극독이 담긴 유리병이 있었으나 하얀 가죽을 더럽히는 상상을 하자니 어린아이를 해코지하는 기분에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날 선 물건을 집어든 것이다. 안나는 문을 밀치고 뛰쳐나가 숲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몇십 분간의 수색 끝에 암사슴의 발굽 자국 몇 쌍을 발견했는데,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져 추적할 수 없었다. 안나는 굶주린 곰처럼 끈질기게 흰 것을 찾아 헤맸다. 당장이라도 흰 사슴의 머리를 움켜쥐고 식어가는 모피를 더듬는다면 갈증이 싹 사라질 거라 확신했다. 곧 비가 내리거든 난항을 겪으리라 예측하여 더욱 필사적이었다.

 그러던 안나는 한순간에 뒤바뀐 향기와 낯선 기류를 마주했다. 사방의 풍경은 분명히 붉은 숲이 아니었다. 이곳이 누구의 영토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불쾌한 소리를 내는 곰 덫으로 뒤덮여 있다. 안나는 길을 지나다 발목을 씹혀 영토의 주인과 피를 튀긴 전적이 있다. 엔티티의 영역은 결국 꼬리를 문 뱀이나 다름없어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지고는 했다. 안나는 비일상적인 이동에 신경질이 돋았다. 혹여라도 이곳에 흰 사슴이 있을 턱이 없다. 이렇게 탁 트인 땅은 초식동물들이 질색하는 무덤이다. 안나는 큰 도끼를 손안에서 한 바퀴 돌리고 몇 초라도 빨리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안나가 무너져가는 목조 건물을 지날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ㅡ누가 겁대가리 없이 내 땅에 발을 들이나 했더니만.

 

 “쥐새끼가 숨어들기에 너무 험한 곳이지. 토끼, 네가 여기 웬일이냐.”

 

 안나가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리자 유리조각 하나 없이 뚫린 창 너머로 맥주병을 비우는 트래퍼가 있었다. 안나는 남성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지나쳤다. 트래퍼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양 나지막이 웃음을 떨쳐냈다. 뒤이어 맥주로 입을 적신 그는 말을 이어갔다.

 

 “저번에 네 숲에 갔더니 하얀 유령 같은 게 있던데.”

 

 무심한 한마디는 안나의 발목을 묶기 충분했다. 자신을 말상대 삼아 심심풀이로 쓰기 위한 덫인지, 무엇인지 분간할 겨를 없이 하얀 유령을 닮아 떠오른 것이 둘인지라 토끼 가면 아래로 주름이 졌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들어 와.”

 

 안나는 건방진 말씨를 잠자코 들었다. 슬슬 가벼운 피로가 돌기 시작했다. 안나는 발에 두른 붕대가 새까맣다 못해 너덜거려도 아랑곳 않고 사슴을 찾아 방황했다. 아침만 해도 누렇게 흰 빛을 띄었던 물건이다. 붉은 숲에 다다르려면 얼마나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흰 사슴을 향한 떠도는 충동은 갈 곳을 잃었다. 그러니 내키지 않는 마음을 뒤로하고 충동 대신 호기심을 처리하기로 했다.

 안나가 맥밀란 사유지의 초라한 건물로 들어서자 ㅡ안나가 기억하기로 트래퍼는 이곳을 집이라 불렀다.ㅡ 갈빛 병과 천쪼가리 따위가 나뒹굴었다. 안나는 반투명한 갈빛 병을 발가락으로 툭 건드렸다가 여남은 맥주가 맥없이 흘러나오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트래퍼는 소파에 편하게 몸을 기댄 채 손에 쥔 지포라이터를 던지고 받으며 빈 나무 의자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안나는 트래퍼의 행동을 이해했으나 앉지도 고개를 내젓지도 않았다. 트래퍼가 위협적인 체구와 낮은 음성을 지닌 남성이라는 점에서 도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허나 안나조차도 엔티티에게 길들여진 구석이 없지 않아서, 도끼를 휘둘러도 트래퍼에게 닿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었다.

 

 “내 숲에 네가 온 걸 모를 리가 없어.”

 

 안나가 조용히 운을 떼자 트래퍼가 안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지포 라이터를 켰다가 끄기를 반복했다. 팅, 팅. 명쾌한 음이 반복됐다. 안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옅은 빛이 남은 라이터를 응시했다. 나의 아이들이 좋아할까?

 

 “오만하네. 신입의 패기인가?”

 

 그가 얼굴에 포갠 곰의 모난 치아 사이로 비뚤어진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착각하는 것도 얼마 안 갈걸. 넌 네가 전지전능한 숲의 왕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엔티티에게 목줄 잡힌 졸개일 뿐이야.”

 

 곰의 두개골 아래로 둔탁한 숨소리가 흩어졌다. 안나는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않았다. 일부는 트래퍼의 말이 옳을지 몰라도 안나는 자신을 부정하는 문장을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나는 숲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알아.”

 

 흥, 잘도 그러시겠지. 트래퍼가 이죽이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안나는 트래퍼의 그런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네가 봤다는 하얀 유령은.”

 

 “아, 그거? 몰라, 진짜 유령일 리는 없겠고. 너스가 최근 들어 망자마냥 싸돌아다니던데.”

 

 안나의 입술이 좁게 벌어지기도 잠시였다. 바라던 답이 나오지 않아 입술을 완강하게 닫았다.

 

 “너무 실망하는 거 아니냐. 찾는 거라도 있어?”

 

 “... 흰 사슴.”

 

 “흰 사슴? 그거 참 드문 놈인데. 그래서 네가 시뻘건 도끼날을 들고 왔구만. 수사슴이라면 꽤 탐나는데.”

 

 “암사슴이야. 손대지 마. 내 거야.”

 

 안나의 눈에 검은 살의가 일렁였다. 트래퍼는 안나의 반응에 킬킬 웃으며 고개를 젖혀 병에 남은 맥주를 전부 들이켰다.

 

 “안심해라. 사슴도 좋지만 난 곰 사냥을 더 좋아하거든. 송곳니가 없는 것들은 시시해.”

 

 안나는 첫 순록 사냥의 쾌감을 잊지 못했다. 어머니를 죽인 놈은 아니었음에도 들불과도 같은 전율이 척추를 따라 내달렸다. 뿔 달린 것들은 송곳니 달린 것들처럼 위험했다. 안나의 얼굴에는 동의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트래퍼 또한 안나의 의사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 요즘 숲에 쓸만한 곰은 없어? 곰 사냥 못한 지도 오래됐지.”

 

 트래퍼는 그새 새 맥주를 따 목을 축였다. 처벌을 마친 안나가 눈을 뜨면 보이는 풍경이 바로 곰의 발톱으로 흉진 나무들이었다. 안나는 그 앞을 사뿐히 달려가는 흰 사슴을 상상했다.

 

 “있어. 하지만 네 몫은 아니야.”

 

 “허, 그 숲에 몸 누이는 동물이 몇인데 곰 하나 못 줘?”

 

 “내 숲이니까.”

 

 “됐다, 됐어. 너 그거 아냐? 옛날에 어디가 아프면 동물을 잡아다 아픈 곳과 같은 신체 부위를 요리해서 먹었어. 아, 곰 우둔살이 저녁 식사로 끝내주지.”

 

 취기가 오른 트래퍼가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온통 흰 사슴으로 들어찬 안나에게서 작은 관심을 이끌어냈다.

 

 “먹으면 나아?”

 

 “글쎄?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먹어 봐. 엔티티의 개가 된 이상 뭘 잡기도 전에 고통이 멎겠지만.”

 

 안나는 트래퍼의 모호한 권유에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효험에 관해 잠시 안나는 고민하던 안나는 짧은 대화를 끝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소녀들이 아프지 않게 돌볼 수 있다면 백 마리고 천 마리고 짐승을 잡아다줄 테다. 트래퍼는 등에 대고 가냐고 물었으나 안나는 얕은 생각에 발을 걸치고 답하지 않았다. 안나는 뭉근한 걸음으로 쿰쿰한 맥밀란 사유지를 거쳐 숲의 초입에 다다랐다. 암녹색 잎사귀가 깔린 길로 들어서자 익숙한 안개가 사방에서 안나를 포위하며 감쌌다. 기분 나쁜 안개는 승냥이보다 예고가 없었다. 안나 완성되지 않은 멧돼지 상아 화환을 그리며 안개에 몸을 맡겼다.

 익어가는 작물이 가득한 힐빌리의 땅이었다. 마른 흙을 짓이기는 사냥꾼의 콧노래가 울려퍼졌다. 안나는 핏빛 도끼날로 흰 사슴을 내리치지 못하는 데 아쉬워하면서도 예기치 못한 사냥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도끼날은 등을 헤집었고 생존자들은 단박에 쓰러졌다. 비명과 선혈, 죽인 숨이 옥수수밭을 뒤흔들었다. 오래간만의 사냥임에도 제법 열이 올랐다. 불씨를 두른 뱀이 뱃속을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안나는 비굴하게 기어다니는 생존자를 둘러멨다. 안나는 기분이 제법 좋았다. 생존자가 검붉은 유리조각으로 찌르기 전까지 말이다. 숱하게 찔려도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통증이 존재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새로 겪는 류의 통증이 생존자를 지탱하는 손의 힘을 빼앗았다. 날카로운 감이 빠른 결론을 내리고 생존자를 땅에 내리찍자 그 틈을 타 제 품에서 벗어나 달려나가는 생존자를 잡은 건 한순간이었다. 죽어가는 생존자 손에 들린 검붉은 유리조각이 보였다. 안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을 발끝으로 차 저멀리 떨어트렸다. 저주를 퍼붓는 생존자의 육신은 곧 안나에게 들려 갈고리에 꿰였다. 안나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뒤로하고 마지막 생존자를 찾아 옥수수 밭 전역을 샅샅이 살피며 누볐다. 그깟 유리조각의 출처를 궁리할 시간이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게 맞다면 발이 빠르고 양쪽으로 땋은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사냥감이었다. 초식 동물이 숨는 장소는 정해져 있다. 피냄새가 흥건하건만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 건지. 톰슨 농장을 하나하나 뜯어보니 이전과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기이하게 매번 달라진다고는 해도 이렇게 허술했던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어야 할 건초 묶음은 사각형 형태가 흐트러졌으며, 나무에 매달린 소는 눈알이 빠진 머리만 매달렸다. 눈에 익은 농기구도 반쯤 허물어져 있거나 사라져 있었다. 않은데다 괴상한 고철 덩어리는 ㅡ누군가 안나에게 이것이 작물 수확에 쓰는 트랙터라 알려주었다.ㅡ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모퉁이가 일그러진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것에 의문을 갖기 이전에 안나가 마지막 사냥감을 찾아냈다. 안나와 붉은 머리 생존자는 한동안 꽁무니를 쫓고 쫓기는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안나의 손에 잡혔다. 안나가 엎어진 생존자의 종아리를 밟고 숨을 골랐다. 제법 즐거운 사냥이었다.

 

 “당장 놓지 못해? 더러운 엔티티의 개가!! 네가 용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지옥에나 떨어져라!”

 

 생존자가 핏대를 세우고 피딱지 앉은 입술을 움직여 소리쳤다. 안나는 고개를 기울이고 생존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옷자락을 집어 들어 갈고리에 걸었다. 방금 전까지 성 내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엔티티가 하강하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마지막 희생이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을 감싸는 안개가 안나의 귓전에 업적을 칭찬하며 붉은 숲으로 이끌었다. 옥수수 잎이 보이지 않는 순간까지도 안나의 목이 시큰거렸다. 안개에 의해 어머니의 집에 도착한 안나는 도끼를 내려두고 침대 위에서 몸을 말았다. 싱싱한 혈향이 잔뜩 배어나오는 만족스러운 희생제였으니 꼬투리 잡는 일은 없을 테고, 어쩌면 한동안 부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픈 목은 분명 잠을 자고 일어나거든 나을 터다. 안나는 까마득한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뚜렷하지 않은 정신으로 창밖을 내다보자 비 그친 밤 숲을 배경으로 하얀 암사슴이 서성이고 있었다. 안나는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몸을 일으켰다. 안나가 얕은 흥분을 품고 문을 열자 사슴은 사라지고 없었다. 안나는 사슴을 곧바로 수색하려 들었다. 여전히 발자국이 짧게 이어지다 끊겼어도 방금까지 이곳에 있었으니 금방 찾으리라. 하지만 뒤늦게 어깨에서 알싸한 통증이 올라와 고개를 수그렸다. 이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안나는 사슴과 통증을 저울질하다 사슴을 쫓는 대신 몸과 마음을 씻어내기 위해 호수를 향해 걸어갔다. 집밖으로 발을 내딛자 얼기설기 돋은 잡초와 축축한 진흙이 밟혔다. 이전에는 북극성의 정반대로 걸어가면 호수가 나왔다. 무언가 뒤틀린 지금, 북극성을 따라 가면 고요한 물의 휴식처가 나왔다. 안나는 호수를 좋아했다. 물고기가 나며 뜨거운 머리를 식히고 때때로 밤하늘의 별과 달이 반사되는 거울이었다. 안나는 호수를 사랑했다. 별과 바람이 바뀐 기이한 공간에 있더라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지금은 조용히 사랑할 따름이다.

 

 그런데 뜻밖의 불청객이 먼저 와있었다. 곧 물을 머금고 찢어질 시체 같은 여자. 너스가 발끝을 호수에 담근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끼 가면 탓에 미간을 종잇장처럼 구긴 안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내 숲이라고 했잖아.”

 

 안나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안나에게는 너스를 위협할 무기가 없었다. 그러나 빈손으로도 그녀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미안하구나, 안나. 지나는 길에 호수가 아름다워서.”

 

 “오래 있지 말고 가.”

 

 흥, 콧방귀를 낀 안나가 너스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앉았다. 남 앞에서 무기도 없이 가면을 벗는 건 지극히 껄끄러운 행위였으나 지금 원하는 건 오직 차가운 물로 눈가와 입술을 닦는 것이었다. 너스는 안나가 얼굴을 씻어내는 양을 가만히 바라봤다. 너스는 분명 존재감이 없는 외형이었으나 실제로 그 존재감을 숨기기는 힘들었다. 안나는 시선에 신경질이 났다. 새까만 눈이 험악하게 뜨이자 너스가 목 졸리는 말소리를 흘렸다.

 

 “어깨가 피로 젖어 있어서. 또 생존자들이 같잖은 반항을 했나보구나.”

 

 “... 관심 꺼.”

 

 “어쩌면 네가 날 끌어당긴 걸지도 모르겠구나. 아프면 언제든 말해주렴. 도와줄 테니.”

 

 너스는 가시 돋친 반응에도 담담했다. 그 뒤로 긴 적막이 이어졌다. 풀벌레가 울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너스의 치맛자락과 안나의 가면 베일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호수에 반사된 밤하늘은 너스가 발을 움직이는 족족 파동에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안나는 바람이 자신의 체온을 앗아가는 감각을 느끼며 주변을 응시했다. 흰 사슴이 물을 마시려 이곳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한때 내 아이들과 함께 이런 호수를 오는 게 꿈이었단다.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 말고 이런 풍경을 즐길 여유가 없었거든."

 

 “아이가 있었어?”

 

 “아니, 난 한 번도 아이를 가진 적 없어. 하지만 늘 아이가 있었으면 했단다. 먼 옛날 얘기지만.”

 

 안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안나는 자주 감성적으로 돌변하는 사람이었고, 아이라는 단어는 마음을 열고 흔드는 요소였다. 떠나간 눈망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안나는 별안간 과거의 슬픔이 되살아났다. 안나는 한참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 내 아이들은 매번 죽었어.”

 

 “... 어째서?”

 

 “모르겠어. 병에 걸려 아팠나 봐. 난 그 애들을 사랑하는데 항상, 항상.”

 

 안나가 심장부를 그러쥐었다. 한 아이를 사랑할 때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목에 남은 시큰대는 통증마저도 우울하고 분노로 느껴졌다. 너스는 수면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정도로 떠올라 호수를 가로질렀다. 물 위를 비행하는 형상은 물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너스는 가뿐히 날아 안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애들이 보고 싶어. 난 이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

 

 “사랑은 본래 아픈 거란다. 너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어. 나 또한 내가 돌보는 아이들을 잃었으니.”

 

 무릎을 모으고 자신의 감정에 빠져 있던 안나는 각진 어깨를 쓸어올리는 찬 손길에 퍼뜩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이목구비가 흐리멍텅한 베갯잇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안나, 그리움은 때때로 강력한 힘이 된단다. 그 아이들의 찰나가 네가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가 되진 않았니.”

 

 안나가 침울해하며 대꾸하지 않자, 너스가 낡은 체크무늬 손수건을 꺼냈다. 너스는 손수건 일부를 청량한 호숫물에 적셔 손수건으로 붉은 열매를 감싸 안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외로운 밤에 곁에 있어 주어 고맙구나.”

 

 인사를 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안나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을 때, 붉은 숲이 비명을 질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붉은 숲에 스며든 안개가 요동치며 소리쳤다.

 

 “이걸로 다친 어깨를 닦도록 해. 부상 부위는 깨끗해야 한단다.”

 

 다음에 보자, 너스는 후일을 기약하고 나무 새로 사라졌다. 안나는 붉은 숲을 보며 처음으로 자신의 것 같지 않다는 감상을 남기며 붉은 열매를 입에 넣었다. 혀로 둥근 열매를 감싸고 송곳니로 터트리자 단맛이 돌며 찔린 어깨의 통증이 잠잠해졌다. 거짓말이 아니었네.

 

-

 

 안나는 너스를 자주 만났다. 처음에는 손수건을 돌려주려는 목적으로 찾아갔다가, 한마디고 두마디고 대화가 쌓였다. 그러다 머무르는 시간과 침묵 속에서 시선을 마주하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스스로 옷을 벗어 부상 입은 여린 살갗을 내보일 지경이 되었다. 만남은 그녀가 찾아오거나 안나가 찾아가는 등 불규칙하게 반복됐다. 안나는 여성에게 무른 편이었으며 실로는 굶주린 외로움이 다정한 손길을 원했다. 너스는 안나에게 한결같고 사라지지 않는 온기를 제공했고 소녀마저 없는 이 세계에서 거대한 위로가 되었다. 보호자를 닮은 강인함과 섬세한 언행은 안나의 마음을 기울기 충분했다. 안나의 외면은 거대하나 내면은 기실 여린 소녀였다. 안나는 접근하기 어려운 여자였기에 선뜻 다가와 충족시켜준 자는 너스가 처음이었다. 안나가 파악한 너스는 강한 여성이었다. 몸을 내맡겨도 될 강인한 여성. 여전히 너스가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인상은 완전히 벗어버릴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치명적이었다. 안나는 너스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따라서 위로가 이유가 되는 건 머지않아서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잦아들었다.

 

 “잘 했다. 너는 역시 나와 엔티티 님을 실망시키지 않아.”

 

 안나는 목적을 찾고 성실하게 임했다. 부쩍 희생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너스가 손을 뻗으면 안나는 허리를 수그려 닿기 쉽도록 애썼다. 너스가 가느다랗고 핏기 없는 손으로 뺨을 어루만져줄 적마다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살아있는 불을 삼켜도 이보다는 덜 자극적일 테다. 안나는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감각이 자주 찾아들었다. 너스를 마주하면 혈관의 피가 달궈지며 숨이 막혔다. 안나는 숨을 가다듬고 뺨을 데운 열기가 가시면 사색하곤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안나는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안나는 매 아침 있는 사냥을 넘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너스와의 만남 이후 다소 멍한 모습으로 어머니의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안나의 손엔 더러운 도끼가 들려 있었다. 근래 들어 도끼가 몇 사라져 선택의 폭이 좁아졌는데, 엔티티의 소행인 게 분명하여 내키지 않아도 따랐다. 안나는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무방비한 흰 사슴이 네 다리를 뻗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뭇잎에 가려지지 않은 전신을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제법 가까웠다. 마른 침을 삼키며 무심코 큰 도끼를 양손으로 쥐자 흰 사슴이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은 아니다. 더러운 도끼날은 저 사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도대체 언제 다시 이렇게 마주할 기회가 있을까. 사슴이 경직된 안나에게 사뿐사뿐 다가왔다. 안나는 갈등의 답을 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가까이서 보니 인상이 흐릿한 모습이 너스와 닮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별이 터져 쏟아지듯 전신을 선혈이 왈칵 돌고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무심코 너스가 제게 하듯 손을 뻗자 단단하고 까끌한 콧잔등을 붙여 왔다. 매 호흡이 느껴졌다. 뜨겁고 생동감 있다. 안나는 위아래로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사냥개가 아닌 이상 동물을 살갑게 쓰다듬는 행위는 사냥꾼에게 금기였다. 그 다음번, 활을 든 채 시선이 마주치면 맞닿았던 손이 흔들린다는 속설 탓이었다. 안나는, 이러한 접촉이 나쁘지 않았다.

 똑똑한 흰 짐승은 안나가 마땅찮은 도끼날을 쥐는 날에만 찾아 왔다. 안나가 핏빛 도끼날을 들고 먼저 찾으려 들면 털 한 올 내비추지 않았다. 콧잔등만 훑던 손은 만남이 거듭될수록 목과 흉통으로 내려가, 끝내는 등을 쓰다듬고 단단한 발굽과 허리에 기대 허밍하며 함께 밤을 보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며 안나는 한편으로 배를 가르는 상상을 했다. 꾸준한 열기와 고동치는 심장이 사슴의 목을 찌르라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이 영리한 짐승을 보라. 자신이 특별함을 아는 사슴이다. 그것이 다가오면 마성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손을 내밀고 말았다. 안나는 흰 짐승을 너스에게조차 비밀로 부쳤다. 사냥꾼으로서의 자질에 결함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

 

 이번 희생제는 무언가 이상했다. 수준 높은 생존자는 저런 패기를 보이기도 하나, 실력을 넘어선 올곧은 정신이 보였다. 어떤 생존자는 나무 몽둥이를 휘둘렀다. 희망이 지나치다. 하지만 안나는 죽어가는 물고기보다 갓 뭍에 나온 물고기를 선호했다. 안나는 그들을 도륙하며 몰려드는 흥분에 이성을 놓았다. 결정적인 일격으로 목을 찔려도 멈추지 않았다. 기어이 생존자 중 둘은 갈고리에 걸지 않고 즉결처형을 감행했다. 도끼를 재차 내려치자 생존자가 붉은 유리조각을 떨궜다. 안나는 그것을 밟고 서서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처벌을 예상했으나 엔티티의 거미 다리가 올라가며 희생제가 끝나도 엔티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나는 너스를 찾아 전 영역을 돌아다녔다. 창백한 인영은 레이스의 영역에 있기도, 스피릿의 영역에 있기도 했다. 이번에는 예배당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너스는 베갯잇을 내려두고 저 멀리에서도 눈에 각인되는 붉은 머리칼을 내놓고 있었다. 안나는 조급한 걸음으로 달려갔다. 스스로 걷고 있다 여겼지만, 사실상 뛰고 있었다. 어느정도 가까워지자 너스는 잿빛 얼굴을 보여주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안나는 깨달음의 문턱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너스를 볼 때 심장을 움켜쥐는 답답함과 사슴과 살을 맞댈 때의 열기가 동일했다. 훌륭한 사냥감 앞에서 심장이 뛰지 않는 사냥꾼이 어디 있으랴. 너스를 사냥하고 싶은 거다. 여태까지 너스의 목에 송곳니를 묻고 배를 더듬어 안에 든 것을 삼키고 싶었던 거다. 그녀는 살인마인 동시에 호랑이니까. 결론을 내리니 목에 턱 걸린 덩어리의 온기가 덜해졌다. 그게 맞다. 그녀의 눈길 하나에 움트는 감각이 사냥욕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너스가 안나의 목을 자세히 보기 위해 뻗은 손을, 안나가 겹쳐 쥐어 제 뺨으로 이끌었다. 너스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어중간하게 수그린 자세는 제법 볼품없었다. 너스는 그 모습에 짧은 코웃음을 흘리며 뺨을 어루만졌다.

 

 “귀가 붉어졌네, 안나.”

 

 “... 응.”

 

 부딪혔니? 아니. 다친 목은 아프지 않고? 응. ...누가 그랬는데, 아픈 부위가 있으면 동물을 잡아서 같은 부위를 요리해서 먹었대. 그럼 낫는다고. 정말이니? 흥미롭구나. 짧은 대화가 오갔다. 둘은 가만히 앉아 별 하나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나는 이 순간, 심장에 도끼가 꽂힌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귀가 홧홧하고 괜스레 손가락이 바르작대며 움직였다. 안나와 너스는 한참이고 어깨를 맞댄 채 불지 않는 바람을 만끽했다. 일순간 공간이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을 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너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봐야겠어. 응. 다음에도 올 거니? 그럴게. 너스는 아참, 하더니 안나의 손에 붉은 열매를 쥐여주고 떠났다. 안나는 손 안에서 열매를 굴리며 너스의 시체를 상상하는 동시에 감히 그녀를 벨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전에 트래퍼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스가 숨을 거두면 심장을 빼 삼키리라. 그럼 이전처럼 아프지 않은 삶을 살겠지.

 몇 번의 희생제에서 생존자들은 더욱 대담해졌다. 숲은 소리를 지르는 빈도수가 늘었다. 엔티티는 관여하지 않았다. 모든 게 낯선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나 안나는 제 숲만 건재하다면 아무렴 상관없었다. 최근 숲에 찾아온 변화라고는 곰의 수가 줄어든 것밖에 없으니까. 또다른 변화는 안나다. 핏빛 도끼날을 든 날에도 흰 사슴이 찾아왔다. 안나는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는 흰 사슴을 죽일 수 없었다. 흰 사슴을 만나기 전 다른 수사슴의 목을 치고 왔건만. 아마 이 사슴은 알고 있을 테다. 다시금 심장이 아려왔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너스도, 사슴도. 안나는 핏빛 도끼날을 들었다.

 결국 진실을 마주했다. 이건 사냥욕 따위가 아니다. 안나는 너스를, 샐리를 사랑한다. 안나에게 사랑은 오직 소녀와 어머니를 위한 단어였지만 이제는 과거다. 안나는 지옥불에 타더라도 너스를 원한다. 너스의 장기를 헤집는 대신 목에 입술을 비비고 어깨에 팔을 감고픈 욕망이 더 크다. 사랑하는 사슴을 제 손으로 죽인 후에야 알았다. 안나는 간만에 불어 닥친 상실감에 잠겨 선혈이 튄 진흙탕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예상한 결과와 정반대였다. 폭풍우와 결이 비슷한 상실 뒤에 너스를 잃을 자신이 없었다. 안나는 식어가는 암사슴을 내려다 보았다. 심장부를 더듬자 온기가 남아 있었다.

 할 일이 남았다. 안나는 무섭도록 내면에 몰입하는 자였다.

 

 너스는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 너스는 곧 울 것 같은 안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안나는 달음박질의 여파로 숨을 몰아쉬며 너스에게 핏물이 잔뜩 밴 한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암사슴의 뜨거운 심장이 있었다. 너스는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고개를 기울였다.

 

 “... 약을 네게 줬으니 오직 너만 나를 치료할 수 있는 거야.”

 

 안나는 자신의 심장부를 가리켰다. 너스는 안나의 손끝을 따라 안나의 심장부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너스가 자신의 심장을 꿰뚫어 보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거니.”

 

 “...모르지 않아.”

 

 너스는 고요했다.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수긍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안나는 적막에 흐르는 낯선 감정이 두려워 그대로 등을 돌렸다. 안나는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

 

 훈연실에 처박혀 멧돼지 상아로 화환을 엮던 안나는 퀘퀘한 향기에 훈연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저 앞 나무와 나무 사이에 새빨간 불길이 넘실거렸다. 안나가 다급히 훈연실 2층으로 올라가 숲 전경을 살피자 숲은 붉은 불로 물들어 그야말로 붉은 숲이라는 이름의 소임을 다했다. 불을 꺼야한다. 안나는 단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질주했다. 짙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북극성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유일한 어머니의 유산이다. 어머니 그 자체이다. 안나는 무작정 뛰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맥밀란 사유지였다. 하지만 사방이 불바다였다. 헐떡이며 두리번거리자 벽 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나이트메어가 안나를 불렀다.

 

 “야, 토끼. 네 멍청한 얼굴을 보니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군.”

 

 “... 내 숲에 불이 났어.”

 

 “어디든 그래.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 생존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어.”

 

 “왜?”

 

 “왜냐니. 보나마나 엔티티 세계를 벗어나 집으로 가게 해달라는 이유지. 그래서 넌 어느 편이지? 돌아가고 싶나?”

 

 안나는 답하지 않았다.

 

 “이곳이 마음에 든다면 웬만해서 마주치지 마. 돌아가고 싶다는 쪽이 우리보다 수가 많아서 순식간에 당하니까.”

 

 아, 대체 엔티티 그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거야? 엔티티가 있으면 순식간에 정리될 텐데! 안나는 신경질을 내는 나이트메어를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주의를 기울여 영역과 영역을 이동했다. 인기척이 들려 몸을 감추자 맥주병, 농기구 등을 개조해 연장으로 쓰는 생존자와 강력한 살인마들이 벗겨낸 곰 가죽을 덮어 쓴 채 몰려다녔다. 나이트메어와 헤어지고 얼마 안 가 만난 클라운의 말에 따르면 엔티티가 부여한 능력이 약화되었으며, 그들이 쓰는 불길은 물로 잠들지 않는다. 거기다 무기에는 알 수 없는 독약이 발라져 있다고 했다. 독약은 살인마에게 깃든 불사의 축복을 허문다고, 조심하라고. 안나는 불길 틈을 지나다니며 온통 너스 생각뿐이었다. 너스가 다쳤다면 참지 못할 듯 했다.

 안나가 불길을 피해 부서진 발전기에 몸을 기댔다. 뜨거운 열기 탓에 흐르는 땀을 닦고 일어서려던 차에 발전기가 삐걱이며 쓰러졌다. 사냥 중이었다면 대실패다. 큰 소리를 들은 무장한 생존자들이 달려와 곧바로 공격을 퍼부었다. 창과 긴 칼이 앞을 오가고 휴지를 꽂은 맥주병이 날아들었다.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안나는 엔티티의 능력 없이도 강하다는 점이다. 그녀는 몇십 년간 숲에서 홀로 살아남은 억척스러운 자였다. 안나는 창을 멧돼지의 상아, 칼을 호랑이의 발톱, 맥주병을 독수리라 여기고 몸을 움직였다. 안나의 회피는 유연했으며 흐트러짐 없었다. 눈을 깜빡이면 앞에 있던 안나가 뒤로 치고 들어와 손도끼가 등을 꿰뚫었다. 아무리 무장한 인간이라 한들 야생동물을 상대해온 안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지치지 않은 안나를 본 생존자들이 몸을 떨며 달아났다. 안나는 붙잡지 않고 너스의 흔적을 찾았다. 머지않아 썩은 들판에서 소란스러운 낌새를 찾아냈다. 인근에 생존자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상처를 보아하니 뼈톱에 당한 흔적이다. 바로 앞에는 데스슬링거와 트래퍼, 두 명의 생존자가 너스와 대치하고 있었다. 네가 내 친구를 죽였어. 엔티티의 앞잡이는 죽어버려!! 생존자들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너스는 집중적으로 공격 받았는지 많이 지쳐보였다. 안나는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팔을 젖혀 손도끼를 던졌다. 손도끼는 생존자의 이마에 명중했다. 생존자가 쓰러지자 이목이 안나에게로 돌아왔다.

 

 “... 안나.”

 

 “오, 토끼, 너도 엔티티를 도울 셈인가? 의왼데. 너스와 정분 난 건 진작 알고 있었다만.”

 

 트래퍼의 물음에 안나는 너스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상체를 낮추며 성대를 긁어 포효했다. 송곳니를 드러낸 안나의 모습에 트래퍼는 낮은 코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이곳의 생활이 이골이 난 참이거든. 얌전히 죽어.”

 

 탕!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스슬링거의 작살총이 안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피하자 생존자 중 하나가 안나의 다리를 향해 맥주병을 던졌다. 안나는 맥주병이 닿기 전 큰 도끼로 맥주병을 쳐내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했다. 맥주병이 깨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발치에 불길이 치솟았다. 불을 확인한 틈에 트래퍼가 코앞까지 다가와 클리버를 가로횡으로 휘둘렀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기습에 오른쪽 팔이 길게 찢어졌다. 상흔은 저릿저릿하며 경험 이상으로 얼얼했다.

 눈을 흘기자 데스슬링거와 생존자 둘이 너스를 노리고 있었다. 너스는 블링크로 몸을 피하며 생존자에게 반격을 가했으나 데스슬링거가 작살총으로 뼈 톱을 막았다. 그 또한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날 앞에 두고 어디에 한 눈 파는 거야?”

 

 트래퍼는 근육질 몸과 달리 신속하게 접근했다. 안나는 더이상 너스를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트래퍼는 안나의 어깨를 노리고 클리버를 내리쳤다. 안나가 너스에게 완전히 정신을 쏟았더라면 치명상을 입었을지도 몰랐다. 안나는 한 바퀴 돌아 트래퍼의 복부를 걷어차 거리를 벌렸다. 트래퍼는 고꾸라지지 않고 양발을 땅에 붙이고 밀리는 데 그쳤다. 안나가 큰 도끼를 가로로 긋자 트래퍼가 뒤로 도약했다. 그대로 다시 한 번 휘두르니 트래퍼는 공격을 피하며 클리버 날을 세워 도끼를 움켜쥔 안나의 손을 찍었다. 통증에 안나가 반사적으로 큰 도끼를 놓쳤다. 트래퍼는 땅에 떨어진 큰 도끼를 재빨리 걷어차 안나가 바로 집을 수 없게 했다.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네, 트래퍼가 입매를 밀어올렸다.

 안나가 도끼로 고개를 돌리자 트래퍼가 팔꿈치로 안나의 얼굴을 가격했다. 제대로 얻어맞은 안나는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싸움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시바삐 이 녀석을 쓰러트리고 너스를 지켜야했다. 안나는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훔치며 으르렁대는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트래퍼가 안나의 목을 노려 클리버를 휘둘렀다. 안나는 배짱 좋게 클리버 날을 손바닥으로 받아내고, 맨주먹으로 트래퍼의 턱을 후려쳤다. 트래퍼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거리를 벌리기는커녕 클리버를 세워 안나의 허리에 쑤셔 넣었다. 안나는 클리버 날이 완전히 파고들기 전 억척스러운 발길질로 트래퍼를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걸린 손도끼로 트래퍼의 어깨를 강타했다. 트래퍼가 비틀대며 물러났다. 허리에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은 액체가 흐른다. 일전에 한차례 부상 입었던 자리다. 안나는 현기증과 고통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가뿐했는데, 어째서. 안나는 트래퍼가 어깨에 박힌 도끼를 뽑는 틈에 또다른 손도끼를 던졌다. 트래퍼가 얼굴을 향해 날아온 것을 피하고 우쭐해하는 것도 잠시다. 두번째 것은 무방비한 목에 정확하게 꽂히며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왔다. 트래퍼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이 정도면 충분히 질긴 사냥감이다. 트래퍼는 본래 포식자였으니 당연하다.

 트래퍼의 클리버에 녹색 액체가 엉겨붙은 모양이 무언가를 바른 성 싶다. 안나의 육체는 말을 듣지 않았다. 빠르게 호흡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안나는 어느새 살인마들의 기적적인 회복능력에 익숙해져 있었다. 안나는 평소와 다른 몸 상태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안나는 무거운 고개를 돌려 너스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던 창백한 인영은 여기저기 그을리고 피를 흘려 존재감이 짙어졌다. 안나는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나동그라진 큰 도끼를 집어 들었다. 안나에게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물어뜯어서라도 늘어질 의지가 있었다. 긴장한 생존자들이 쓰러진 트래퍼와 안나를 번갈아 보며 주시했다.

 안나는 여유가 없었다. 너스에게 가는 길에 걸리적거리는 생존자가 있었다. 안나가 사나운 야수를 연상케하는 몸놀림으로 도약해 큰 도끼로 휘둘렀다. 그 때 안나에게 작살이 날아들었다. 허공에 뜬 안나는 무방비했다. 하지만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데스슬링거의 신음이 울리더니, 작살 끝은 허공을 갈랐다. 안나의 민첩함을 읽지 못한 생존자는 속수무책으로 목덜미를 공격당했다. 그런데 큰 도끼가 두터운 곰 가죽에 반쯤 가로막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치명상을 입지 않았을 따름이지 안나의 힘은 고스란히 전해져 생존자가 비틀거렸다. 안나의 행동마다 맥주병이 따라왔다. 발 딛는 곳마다 불길이 넘실거렸다. 안나는 베일에 붙은 불을 끌 겨를이 없었다. 독약이 방해한다 한들 사냥꾼은 사냥꾼이다.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온다. 곰은 등가죽이 두꺼워 머리와 목을 노려야 한단다. 안나의 눈이 광증으로 번득였다. 생존자가 긴 창으로 안나의 가슴팍을 찌르자 안나가 창의 머리를 쥐고 꺾어 창날과 창신을 분리시켰다. 안나는 숨을 몰아쉬며 단단한 손과 팔로 생존자의 목을 꺾었다. 생존자 하나가 쓰러졌다.

 

 “엔티티의 힘이 약해졌다고 했잖아! 저 괴물은 뭔데?”

 

 나머지 생존자가 너스와 거리를 벌린 데스슬링거의 뒤에 숨어 잔뜩 겁먹은 채 외쳤다. 데스슬링거가 혀를 차며 작살총을 재장전했다.

 “숲에서 나고 자랐다 해도 인간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골치 아프구만.”

 

 안나는 점점 심신을 가누기 힘들었다. 전신이 아프고 저릿했다. 두꺼운 숨이 목에 턱턱 차올랐다. 이대로 호수에 발을 담그면 너무 무거운 나머지 영영 아래로 가라앉을 게 분명했다. 안나는 도끼를 땅에 딛고 그것에 몸을 기대어 서있었다. 너스가 안나를 바라보지 않고 읊조렸다.

 

 “안나. 개입하지 않아도 된단다. 나를 돕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잖니.”

 

 도끼에 기댄 몸이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부상이 심각했다. 독은 안나의 정신을 잠식했다. 그 사이 무장한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들은 전부 분노와 희망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너스는 물량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누군가 한 눈 팔 때마다 숨을 앗아갔다. 그만큼 강력한 살인마였던 터라 누구도 신경을 돌려 안나의 숨통을 끊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너스가 블링크로 이동할 때마다 붉은 불길 위로 새카만 재가 휘날렸다. 비명과 기합이 난무했으며 간간히 작살총이 발사되는 소리와 어린 살인마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눈을 뜨자 너스의 등이 보였다. 옷가지가 넝마가 되어서는 붉은 머리칼이 새어나왔다. 너스의 몸에는 일반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할 치명상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녀는 수십의 상처를 안고 서있었다. 너스의 정면에는 무수한 생존자와 살인마들이 무기를 고쳐 쥐며 둘을 물어뜯을 준비를 했다. 둘은 수적으로 불리했다. 아무리 너스라 한들 엔티티의 권능이 약해진 지금 위태로운 상태일지도 몰랐다.

 안나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향을 맡았다. 그녀는 최후를 기다리고 있다.

 

 안나는 호랑이의 아가리에서 달아나는 사슴처럼 겁을 먹고 달음질해 너스를 당겨 안고 돌아섰다. 안나...? 사랑하는 여인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응할 정신이 없었으니, 안은 채로 나아가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맥주병이 안나의 너른 등에 부딪혀 깨지고 불화살이 쏟아져 좋은 과녁에 꽂혔다. 손도끼와 투척용 단검도 그 뒤를 따라붙었다. 지혜로운 이들은 미련한 행동을 놓치지 않고 종점을 찍었다. 허공을 가른 창이 안나의 심장을 관통했다. 숨을 내쉴 적마다 검붉은 피가 입술 새로 흘렀다. 안나는 이상하게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감기는 눈을 받아들이고, 목을 쥐어짜 너스에게 속삭였다.

 

 “내, 선택이야. 붉은 열매를 먹은 순간부터...”

 

...

 

 “이번이 두 번째야.”

 

 흐려져가는 의식 소리로 높낮이 없는 건조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널 어쩌면 좋을까? 아직 나는 답해주지 못했는데...”

 

 헌트리스가 죽었다! 안나는 환호성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스러져가던 너스가 활약했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생존자와 살인마는 연명할 수 없었다. 극소수의 살인마만이 자리에 남았다. 너스는 그들의 절망을 모아 엔티티를 회복시켰다. 엔티티는 쇠약해져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엔티티의 편에 선 살인마들은 엔티티가 감정을 힘으로 이용했으니 어쩌면 너스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었다. 하지만 냉랭한 그녀가 도대체 어떤 감정을 매개로 삼는단 말인가? 엔티티는 너스의 활약에 무척 흡족했으며 자신의 힘을 회복하고 죽어버린 생존자와 살인마를 비롯한 세계를 재구축하기 위해 잠시 희생제를 중단했다. 엔티티가 까딱이자 반란의 잔해는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까마귀가 가득한 엔티티 세계는 평화로웠으며,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안나를 길들이라 명하기를 잘했구나. 그 애가 널 지킬 방패가 되다니.

 

 엔티티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너스는 베갯잇을 내팽개쳤다. 그리고 날아올라 칠흑으로 뒤덮인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허밍을 흥얼거렸다. 붉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녀의 품에는 말라가기 시작한 암사슴의 심장이 있었다. 암사슴의 심장은 이제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거친 숨결이 깃든 콧노래는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것은 안나의 노래였다.

후기

견고님: 저는 Dzivia-Flower Mai를 들으며 작업했답니다. 

 

사냥꾼과 동물이라는 소재를 좋아해서 이전부터 쓰려고 했는데 이 기회를 타 적어봤습니다. 생각보다 분량이 길어진데다 현생에 치여서 뒤로 갈수록 후다닥 끝나는 기분이지만 ^^;;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손보고 싶어요.

제가 바쁜 일이 끝나면 이것저것 생략한 부분과 자잘한 해석에 대해서 적어보겠습니다!

항상 헌트너스 함께 파주시는 분들과 정말 정말 많이 양해해주신 주최진님께 (도우님!) 감사드려요. 알러뷰!

헌트너스 포레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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